참전용사 ‘실질적 예우’문제 정부-국회가 해결해야금년은 베트남파병 49주년이 되는 해다. 파병 50주년을 불과 1년 앞두고 있다. 먼저 질문을 하나 제시한다.“한국군이 1948년 건군 이후 참전한 전쟁은 모두 몇 차례일까”“맞다. 두 차례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이다.”6.25전쟁은 국가적 차원에서 모든 국민이 참가해 총력전으로 국가의 명운을 걸고 치렀
전쟁 끝난지 50년-참전용사 명예회복은 아직 멀어국군의 베트남파병은 긍정적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픈 이면의 이야기도 돌이켜 봐야 한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아픔은 베트남의 전선에 바쳐진 젊은이들의 목숨이다. 한국군 참전기간 8년6개월에 32만명이 참전하여 그중 5099명의 전사망자는 영원히 되돌아 올수 없는 길로 가고 말았다. 1만1000여명의 부상
파월기간 8년 직-간접 효과 50억달러, 오늘날 富의 초석6·25전쟁과 베트남전쟁은 다른 점도 있지만 닮은 점도 많다. 한민족에겐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전쟁이 일본에겐 기회였다. 반대로 베트남전쟁은 한국에 기회를 제공했다. 한미관계는 물론 정치·외교·국방 분야와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다.베트남파병 직전인 1963년 한국의 1인당
실전 경험-예비군 창설 등 안보강화-방산체제 갖춰군대는 항상 전투위주 사고방식을 견지해야한다. 군대의 전투경험은 전투력의 핵심적 요소다. 그러나 한국군 전투부대가 파병되던 1965년도 후반기가 되면서 전투경험자는 영관급장교 이상 일부계층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투경험을 위해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국가들은 많은 예산과 장비를 투입해
대미관계 강화가 비동맹-공산권과는 외교적 손실 초래군사정부는 출범 초기 외교의 폭을 확대하기 위해 중립국가들과 관계개선을 시도했다. 당시 비동맹 중립노선을 표방하는 아프리카의 대부분 국가들이 유엔에 가입함에 따라 미국이 주도했던 유엔에서 ‘제3세계 국가들의 단결’이라는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병 여파로 비동맹권 국가와 대결구도 심화한
아스팍-참전국 정상회담 주도 국위 선양 계기로1966년 6월 14일, 서울에서 아시아태평양각료회의(ASPAC, Asian and Pacific Council) 제1차 총회가 열렸다. 한국, 일본, 타일랜드, 말레이시아, 필리핀, 자유중국, 남베트남,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9개국의 회원국과 옵서버로 참가한 라오스 등 총10개국 외무장관이 참석했다.◇
미 일방적 주도 관계서 상호 협상관계로 바뀌어6·25전쟁 직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비대칭조약이었다. 미국의 방기를 우려한 한국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조약의 비준과정에서 상원 외교위원회가 ‘외부의 무력공격을 받았을 경우로 한정하는 조항을 추가’한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승만의 북진통일 시도에 연루될 것을 우려했다.따라
허약기반 탈출 돌파구... 정치안정 등 기대이상 성과1961년 5월 박정희 군사정부가 집권했을 때 대한민국의 위상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1인당 연간 국민소득은 125달러인 북한의 70%수준인 82달러에 불과했다. 정치체제 역시 북한의 김일성이 확고한 지도체제를 구축해나가고 있었지만 당시 박정희 정부의 집권 기반은 허약하기만 했다. 지금의 상황과는
비전투 태권도 교관 최범섭 소령은 1966년 6월, 베트남에 파병된 태권도 교관이었다. 당시 한국군은 1964년 9월, 의료지원단을 베트남에 파병하면서부터 10명의 태권도 교관을 파병해 남베트남의 군사교육기관에서 태권도를 가르쳤다. 그때부터 남베트남에서 태권도는 요즈음의 한류 열풍과 같이 군인은 물론 주민에게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태권도가 한국군
북정규군 대공세 펼쳐 안케전투는 수도사단(맹호부대) 기갑연대가 1972년 4월 11일~26일까지 안케고개(deo An Khe) 및 638고지 일대에서 치른 전투다. 그해 3월 증강된 연대규모의 북베트남 정규군이 안케고개 일대에 은밀히 침투했다. 이어 적은 1번 도로를 차단한 후 638고지 하단의 제1중대 기지를 습격했다.수도사단은 기갑연대뿐만 아니라 사단의
'닌호아 작전'의 영웅1967년 11월 6일, 주월 한국군 백마부대의 닌호아2호 작전 시 송서규 중령의 전사는 대대장이 최전방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다가 전사한 최초의 사례였다. 그는 제9사단 제29연대 제2대대장으로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 부임해 온 후임 대대장과 합동근무 중이었다. 따라서 그는 전투현장에 직접 나서기 보다는 후임대대장
살신성인의 귀감고 이상득 하사는 고 강재구, 이인호 소령의 얼을 이어 받은 살신성인의 영웅이다. 그는 제9사단 제28연대 제11중대 제3소대 제2분대 부분대장으로 1966년 9월, 사단과 함께 베트남에 파병되어 뚜이호아 지역에 배치되었다. 당시 뚜이호아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으로 베트남 3대 곡창 중 하나였으며 베트콩의 활동이 왕성한 곳이었다.◇ 두 전
故 조정남·이학현 상병고(故) 조정남 상병은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적장을 안고 자결한 논개(論介)와 비교될만한 영웅이다. 제2해병여단 제11중대가 짜빈동 중대기지를 공격한 1개 연대규모의 북베트남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제3소대 제1분대 소총수였던 조정남 일병과 같이 해병대의 용맹을 과시한 장병의 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짜빈동 기지 피습 당시
제2해병여단 제3대대 작전보좌관으로 베트남에 파병됐던 조경식 대위는 1967년 1월 10일 쭈라이지역 짜빈박 전투에서 전사한 영웅이다. 1966년 8월, 베트남 중부의 꽝응아이성에 있는 쭈라이지역으로 이동했던 해병 청룡부대는 1967년 1월 5일부터 투망작전을 전개했다. 투망을 던져 고기를 잡아내듯 지역 내 베트콩의 은거지를 소탕한다는 의미를 가진 작전이었
위기상황서 몸 던져 많은부하 살린 고 이인호소령제2해병여단 제3대대 정보장교 이인호 대위는 게릴라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정보획득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베트콩 첩자 및 포로를 신문해 첩보를 획득하는 한편 획득된 첩보를 현장에 나가 직접 확인하는 등 적극적인 정보활동을 수행하고 있었다.◇ 적 은거지 확인차 현장 출동 뚜이호아 평
-적 참호돌파 솔선수범 수도사단 제1연대 제5중대 제3소대장이었던 고 정정능 중위는 1966년 3월 24일 띤빈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용맹스러운 소대장이었다. 그가 전사하기 2개월 전 고보이평야에서 수행된 비호6호 작전에서도 정정능 소위의 용맹은 베트콩을 압도했다. 정부는 그때의 전공을 높이 평가해 정정능 소위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다.비호6호 작전 직
훈련중 수류탄 감싸안고 부하들 살린 고 강재구 소령 베트남전쟁과 관련된 최초의 태극무공훈장은 고 강재구 소령에게 추서됐다. 1965년 10월 4일, 강원도 홍천에서 파병을 위한 훈련 중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감싸 안고 순직한 그의 살신성인 정신을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수도사단의 편성과 훈련정부는 1965년 8월 13일, 국회에서 전투부대 파병동의안
주한미군 문제와 연계, 두 단계 나눠 배-비행편 철수북베트남군과 NLF의 뗏(Tet)공세 이후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의 여론이 급격히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미국 대통령이 교체됐다. 민주당의 존슨이 지원한 험프리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된 공화당의 닉슨(Richard M. Nixon)이 1969년 1월 20일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따라서 미국
미 자국 반전여론 감안 한국군 전투사단 증파요청1965년 7월, ‘베트남전쟁의 미국화’를 공식적으로 결정했던 미국 정부는 1965년 말까지 184,300여 명에 달하는 미군을 남베트남에 파병했다. 또한 동맹국인 한국이 1개 사단을, 오스트레일리아가 1개 대대를 각각 파병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베트남 사태를 미국의 의도대로 이끌기
브라운각서 합의 청룡-맹호부대 추가, 주월사령부 창설1964년 8월 ‘통킹만사건’ 이후 미국의 지상군 파병은 예상되어 있었다. 단지 그 시기가 문제일 뿐이었다. 대통령 선거 등의 정치일정에 따라 지상군 파병을 늦추고 있던 미국은 1965년 3월 8일 해병 2개 대대를 첫 번째 지상군 전투부대로 다낭(Da Nang)에 상륙시켰다.이어서 미 합참은 196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