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길이만큼 고대 중국의 위나라에 오기 장군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가면 가장 낮은 계급의 병사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잠자리에 들곤 했다. 권위주의적이기보다는 병사들과 함께하는 리더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오기 장군의 눈에 한 병사가 걷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다리에 난 종기가 곪을 대로 곪은 것이었
정책판단기준의 제1은 위민성 미국 기업들 가운데는 고객을 뜻하는 ‘Client'의 첫 글자를 반드시 대문자로 표기하는 곳들이 있다. 이런 기업들에선 ’Client'라고 쓰지 않고 ‘client'라고 쓰는 건 중요한 문책사유가 된다. 고객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고 하겠다. 그런가 하면 미국
서해대교에선 서해가 안 보인다 서해안고속도로의 장관을 꼽으라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서해대교다. 우리나라 교량기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첨단공법으로 지어진다리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외관상으로도 경관이 빼어난 다리이기 때문이다. 2002년 미국 토목학회에서 달력을 만들었는데 그 달력엔 매달 하나씩 설계가 우수한 교량이 소개되었다. 그 열두 개의 교량에 서해
제3부 길 위에서 생각한다 CEO, 칭기즈칸 어느 증권회사에서 주식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이런 설문을 던졌다. ‘주식투자를 할때 그 기업의 어떤 점을 보고 투자하는가?’ 여러 답변들 이 나왔지만 대체로 그 기업의 재무구조나 실적, 매출과 앞으로의 비전을 본다는 대답이 많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많은 투자자들이 꼽은 것은 ‘그
고속철도와 의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하루 종일 걸리던 시절이 있었다. 경부선 철도가 처음 개통했을 당시, 서울에서 부산을 가려면 아침 먹고 떠나도 새벽 0시가 되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그런데 시속 300km의 고속철도(ktx)를 이용하면 불과 세 시간도 걸리지 않는 시대가 됐다. ‘일일생활권’이 아니라 ‘한나절 생활권&
두더지와 지하철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 비행기를 만들었다.그렇다면 지하철은 무엇을 보고 만든 것일까? 지하철에 관한 아이디어를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영국 런던의 법무관이었던 찰스 피어슨이라는 사람이었다.그가 이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된건 두더지 구멍을 보고서였다.다른 동물들은 지상의 길로 다니지만 두더지는 땅 속으로 다니는 것을 보고
철마는 다시 달린다 우리나라에 철도가 교통수단으로 등장한 지도 100년이 넘었다. 그동안 수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했지만 오히려 그때만 못해진 일도 있다. 가장 아쉬운 건 기적소리를 울리며 남에서 북으로 달렸던 기차를 볼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지금 비무장지대에 남아 있는 녹슨 철로와 기관차만이 묵묵히 분단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을 따름이다. 남북을 잇는 대
사냥를 가장한 철도 측량 경인선 다음은 경부선이었다. 경부선은 경인선보다 6년 늦은 1905년1월에 개통됐다. 그런데 일본이 경부선 철도를 개설하려고 구상한건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였다. 일본 국내에서 한국 침략론이 확산되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 일본은 조선의 철도건설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일본군참모부는 강화조약을 체결한 후 장차 도래할 한국 침략기에
최초의 철도, 경인선 철도가 개설되기 전, 우리나라는 주로 수운과 조운을 이용해서 물자를 수송했다. 그리고 지게나 인력거, 우마차가 물건을 날랐다. 구한말, 우리나라에서3년을 머물렀던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자신의 수기에서 우리나라의 교통수단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조선의 교통수단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길은 좁고 험하고 교량은 드물다. 교통의 주
쇠로 만든 말의 등장 바닷길은 도로와 함께 오래전부터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런데 1825년, 새로운 교통수단이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다름 아닌 철도였다. 동물이나 사람이 직접 물자를 운반하던 시대에 철도의 개발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혁명가는 영국의 조지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이었다. 스티븐슨은 잉글랜드 북동부의 탄광촌인 와이럼이라는 곳에
양산항과 아시아 물류전쟁 중국 상하이에서 약25Km 떨어진 곳에 섬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양산도다. 그저 평범한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이 섬을 상하이시는 최근 길이 32Km의 해상대교를 만들어 육지와 연결했다. 그리고 2005년 12월, 세계 최대의 항만인 양산항이 개항되었다. 항만은 해상교통과 육상교통의 접속지이며 관문이다. 선박이 안전하게 정박하고,
버들치가 돌아온 하천 휴일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청계천, 그곳에서 마냥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콘크리트벽에 갇혀 지내는 도시인들에게 하천이, 그리고 자연이 얼마나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하지만 모든 하천이 쾌적하지는 않다. 낙후된 하천엔 오염된 물이 흐르고 악취가 나는 탓에 지나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럴 때면
청계천의 물길이 47년 만에 다시 열렸다. 2년 3개월의 복원공사 끝에 2005년 10월 1일, 공식 개통되었다. 복원된 청계천 5.8km 구간에는 22개의 다리가 조성됐고, 2급수 수질의 맑은 물이 흐른다. 역사 유적이 복원되고 다양한 어류와 조류가 서식하는 청계천은 이름 그대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명실상부한 도심 속 새로운 명소로 자리잡았다. 지금은
'카트리나‘에서 배운다 2005년 8월, 미국은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9·11테러 이후 미국인 전체가 이렇게 경악한 것은 처음이었을지 모른다. 이번의 테러는 남부지방을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였다. 허리케인은 ‘폭풍의 신’, ‘강대한 바람’ 을 뜻하는 에스파냐어
물의 두 얼굴 얼마 전, 화성을 탐사한 로봇이 전송해온 화면에 과학계는 물론 세계 인의 관심이 모아졌다. 이 전송화면은 한때 물의 흔적을 찾은 것으로 해석돼 지구촌을 들썩이게 만들었지만 아직 명확한 증거를 찾지는 못 했다. 지구에서 멀 때는 무려 3억9,900만Km나 떨어진 화성에 물이 흘렀던 흔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전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물
물길 덕에 ‘떼돈’ 을 벌다 도로는 이민족의 침입을 돕는 근심거리라 해서 육로를 개척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던 우리민족, 그렇지만 뱃길은 꽤 오래전부터 개척해온 것으로 보인다. 처음의 발자취는 고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과 인접한 고조선은 초기부터 중국과 교역을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또 구석기시대인 기원전 1만 년경부터는 일본과도
바닷길 이야기가 나오니, 새삼 떠오르는 인물이 한 사람 있다. 아프리카 케냐의 파테이 라는 작은 섬에 가면 케냐 본토인들보다 밝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말을 들어보면 이들에겐 중국 사람의 피가 섞여 있다고 한다. 정설은 아니지만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때보다 수십 년 앞서 중국인
인류사에 또 하나의 큰 발자국을 남긴 바닷길로는 실크로드의 바통을 이어받았던 교역로가 있다. 흥하면 쇠하는 때가 있고, 또 쇠락의 시기가 지나면 서서히 비상을 시작하는 게 세상사 이치. 실크로드의 운명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장스님의 기행문에 보면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의 중심지였던 중국의 장안은 742년경 인구가 200만 명에 이르렀고
땅위 이곳저곳에서 도로가 건설되는 동안,바다에도 길이 하나 둘 만들어지고 있었다. 배는 바다 위 아무 데나 항해하면 되는 것 같지만 초기 탐험가들에 의해 지형, 수심 등을 고려한 안전하고 정확한 항로가 개척돼 지도에 새겨짐으로써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한 번 항해를 나가면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을 바다에서 보내야 하는 외롭고 험한 날들이었지만 새
‘안전 제일’ 이라는 말이 있다.이 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은 일화에 근거한다. 1905년 적자에 허덕이던 ‘us 스틸(steel)'사의 ceo로 부임한 그리니가 회사의 경영방침을 살펴보니 ’생산성 제일(productivity first)', 품질 제이(quality second)', ‘안전 제삼(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