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탄소중립(Carbon Neutral)이라는 말이 가장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다.탄소 중립이란, 인간의 각종 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탄소의 배출량만큼 숲을 비롯한 바다와 호수 등 자연의 생태적 과정을 통한 탄소의 흡수량이 같게 만들어서대기 중에 탄소를 남기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후 위기(Climate Crisis) 상황을 만든 주범인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화하고, 다양한 탄소 발생 저감 기술을 적용해야 한다.이를 위한 우리 모두의 실천 방안으로서 기후행동(Climate Action)이란 개념또한 중요해지고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스위스는 시계와 섬유로 산업과 무역에 눈뜨고 점차 부를 쌓아갔습니다.스위스의 지정학적 위치는 매우 불리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늘 전쟁터가 되곤 했습니다.그러나 산업과 무역이 발달하면서, 유럽의 중심이자 교통의 요충지라는 위치는 큰 장점으로 부각되었습니다. 알프스 너머의 나라들과 교역하기 위해 19세기 초에는 도로 건설에 주력했고 19세기 중반에는 철도망을 대폭 늘렸습니다.이 교통망이 생각지도 못했던 또 다른 산업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스위스 경제에 큰
지난 5월 국가적으로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에서 2030년 세계 최고의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목표로 하는 ‘K-반도체 전략’을 발표하면서 올해를 시작으로 2030년 K-반도체 벨트 조성과 반도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510조 원 이상이 투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또한, 정부는 반도체의 안정적 공급망 구축을 위해 반도체 단지가 한국을 대표하는 ‘K’를 통해 연결하는 벨트로 조성되도록 하였다. 파운드리와 팹리스는 경기도 판교를 기반으로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을 화성과 용인을 기반으로 메모리와 패키징은 천안, 온양, 괴산 등을 토대로 반도
멈춰버린 국가 포르투갈에 이어 이번에는 다시, 움직이는 국가로 스위스를 두 편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스위스는 2021년 추산 1인당 GDP가 94,560달러로 세계 2위입니다. 룩셈부르크가 1위인데 벨기에, 프랑스, 독일에 둘러싸인 룩셈부르크는 서울 4배정도 크기의 사실상 도시국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스위스가 1위나 다름없습니다. 스위스는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면적은 남한의 40% 남짓으로 경상도보다 조금 큽니다.오랫동안 스위스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알프스 산맥으로 전 국토의 70%가 산이고, 호수를 합치면 7
15세기 말 역사상 최초로 대항해시대를 열고 식민지를 개척했던 포르투갈 제국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고 16세기 말 이후에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식민지를 점령하고 제국을 확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전쟁을 거듭할수록 제국의 경제는 파탄 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당시 인구 백만에 불과했던 포르투갈은 기초체력이 약했고, 큰 제국을 다스리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또 영토 확장은 온 나라와 전 계층의 관심속에이루어졌지만 영토 확장 후에는 귀족과 교회에 부와 권력이 집중되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의 삶은 조
움직이는 국가로 네덜란드와 아일랜드를 살펴봤고, 이번에는 멈춰버린 국가의 첫 번째 사례로 포르투갈을 말씀드리겠습니다.포르투갈은 처음으로 대항해 시대를 열고 식민지를 구축해 제국을 건설했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제국이 되었다가 쇠락한 과정을 두 차례로 나누어 살펴볼 텐데, 오늘은 먼저 식민지 구축의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위치는 지중해 북부 이베리아반도의 서쪽 끝, 유럽의 변방입니다. 동쪽에는 스페인, 서쪽에는 광활한 대서양이 펼쳐져 있고 면적은 남한의 92%로 비슷합니다. 현재 인구는 천만 명이 조금 넘고 202
조광한입니다. 아일랜드는 약 800년에 가까운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에 하나였습니다.특별한 산업기반이 없는 낙후된 경제여건으로 일자리를 찾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해외 이민이 이어져, 1950년대에 약 430만 인구 중 10%인 약 40만 명이 나라를 떠났습니다. 농업중심의 저발전성과 지속적인 인구유출로 인해 미래가 없는 국가로 낙인찍혀 있었습니다.1970년대에도 수출의 70%가 대영국 수출일 정도로 여전히 영국에 의존하고 있었고, 경제적 자립은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됐습니다.‘영국에서 독립했지
유럽에 우리나라와 비슷한 나라가 있습니다. 강대국 옆에서 겪은 수난의 역사와 식민지의 한(恨), 분단의 아픔, 강렬한 민족정신, 노인을 공경하는 대가족 전통과 자녀교육열 등이 비슷합니다. 짧은 시간 내에 가난을 벗어나 선진국으로 올라선 강인한 의지와 역동성까지도 유사합니다.영국 서쪽 바로 옆의 섬나라, 아일랜드입니다.더군다나 아일랜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짧은 10~20년 사이에 유럽의 최빈국에서 최고수준의 부유한 나라로 탈바꿈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거지에서 갑부로, 멈춰있던 국가에서 움직이는 국가를 넘어 뛰어가는 국가가 되었다고
네덜란드 황금기 마지막 편입니다. 금융혁명과 시장경제 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주하면서 암스테르담이 다이아몬드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고 말씀드렸는데, 유대인들이 가져온 것은 다이아몬드만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대부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금융업에도 정통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선진적인 금융기법이 네덜란드로 들어오면서 현대 자본주의 금융시스템의 기본 골격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아시아 무역을 위해 각각 동인도회사를 운영했는데 설립 시기는 영국이 1600년, 네덜란드는 2년 늦은 1602년입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근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확립한 ‘최초의 주식회사’라는 점에서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아시아는 네덜란드 해외무역의
조광한 입니다. 네덜란드의 청어 산업과 농업 혁명에 따른 수출과 무역의 발달은 조선업과 해상운송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조선업과 해운업은 네덜란드 황금기를 이끈 쌍두마차였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유대인과 개신교도들의 이주와 함께 유입된 선박건조기술을 활용해, 근대초기 조선업 분야에서 유럽 해상운송의 혁명이라 일컬어질 만한 눈부신 발전을 만들어 냈습니다. 1595년, 한 조선업자가 ‘플류트(fluit)’라는 파격적인 범선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조금씩 더 효율적으로 개조되었고 17세기 초반 기본 틀이 완성되었습니다. 플류트선은 역사상 최초의 화물전용 운반선인데, 이 배로 유럽의 해운업을 장악해 네덜란드인들은 ‘바다의 마부’라고 불렸습니다. 플류트선은 가볍고, 빠르고, 적은 선원으로 운항이 가능해 운
지난번에 살펴본 대로, 종교적 관용과 포용을 찾아온 유대인과 개신교도의 기술과 자본이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황금기는 어업과 농업의 혁명에서 시작됐습니다. 먼저 어업 부문은 청어 산업의 혁명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서쪽과 북쪽이 북해에 접해있어 어업 특히 청어 잡이의 비중이 높았고, 청어에 대한 기술과 제도를 혁신하며 매우 체계적인 생산기반을 갖추고 단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358년, 빌렘 벤켈소어(Willem Beukelszoon)라는 어부가 단칼에 청어 내장을 제거하는 작은 칼을 개발했습니다
청명한 하늘과 시원한 바람, 붉게 물든 단풍이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며 등산객을 유혹하는 완연한 가을이 왔다.특히 코로나19로 실내 체육활동,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운동 등에 제한이 생기면서 혼자 또는 소수 인원이 즐길 수 있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용이한 등산을 즐기려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이다.그러나, 가을 단풍 시기가 다가오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하지만 철저하게 준비되지 않은 산행으로 낙상 등과 같은 사고들이 발생하여 소방헬기나 119구조대에 구조되어 내려오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최근 산악사고의 사례를
"민주주의란 때로는 피로 목욕을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해서 ‘피의 독재’라고 알려진 독재자,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대통령입니다. 1973년 9월 11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1974년 12월 대통령에 취임했고,집권 17년 동안 나라를 공포로 몰아넣는 독재를 했습니다. 쿠데타 당시 대통령궁을 전투기로 폭격하고 전차와 보병으로포위하고 포격과 사격을 가해 저항하던 대통령의 경호원들과 측근들을 살해했습니다. “투항하면 살려준다.”는 권고에 결국 아옌데 대통령은 같이 싸운 동료들을 위로하고 투항하라고 한 후, 자신은 혼자 집무실로 들어가 총으로 자결했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통령궁을 지키던 사람들은 죽음을 당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676년에 3국을 통일한 신라는 200여 년이 지난 9세기 말에 이르자 왕과 중앙 귀족들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면서걷잡을 수 없이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게 됩니다. 왕과 귀족들은 더욱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게 되고설상가상,흉년과 전염병이 돌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해집니다.결국 농민들은 전국 곳곳에서 봉기하여 조세를 거부하고 떼를 지어 각 지역의 관청을 습격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견훤은 후백제를,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워 후삼국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오늘은 후고구려를 세웠지만 포악함으로 몰락한 궁예를 살펴보겠습니다. 궁예는 왕과 후궁 사이의 자식이라는 설과 몰락한 귀족 가문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궁예는 태어날
세계의 수많은 독재자들 중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처참하게 최후를 맞은 독재자가 있습니다.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입니다. 올림픽의 전설,체조요정 코마네치의 나라입니다. 차우셰스쿠는 1965년 루마니아 공산당의 지도자를 승계 받아 집권했으며 1967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989년까지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1971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고 루마니아로 돌아와 독재와 공포통치를 했습니다. ‘어버이 수령’ ‘민족의 태양’이라는 호칭을 흉내 내서 ‘카르파티아 산맥의 천재’ 또는 ‘정열적이고 총명하며 매력적인 인격의 영원한 우리의 지도자', 줄여서 ‘지도자, 영도자’라고 칭하며 개인 숭배에 모든 힘을 쏟았습니다. 자신과 가족들에 대한 우상화 작업으로 살아있는 신처럼
지난번에는 영국이라는 강자에 맞선 토마스 페인의 ‘상식’과 미국 독립을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가톨릭교회의 절대 권력에 맞선 종교개혁을 말씀드리겠습니다.가톨릭과 기독교의 이야기지만 기득권과 독재에 저항한 내용으로 보면 종교에 관계없이 생각해볼 가치가 충분합니다.중세유럽은 가톨릭의 시대였습니다. 수백 년 동안 교회가 사회의 중심에 놓여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오랜 시간 권력을 독점하면서 교회는 썩고 성직자들은 부패했습니다.그러나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에 걸쳐 르네상스, 즉 신중심 사회에서 인간중심 사회로 서서히 변하면서교회의 엄청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모든 인간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우리에게 너무나도 상식적인 명제입니다. 그런데,아무도 이 명제를 생각조자 못했던 시대에 이 진리를 ‘상식(Common Sense)’으로 선포한 대표적인 선각자가 있습니다. 토마스 페인입니다. 오늘은 토마스 페인의 ‘상식’이라는 책과 미국독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작고 얇은 소책자인 이 책이 미국 독립의 발화점이 되었고, 이 책으로 인해 미국은 독립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700년대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에는 13개의 영국 식민지가 있었습니다.13개 식민지마다 본국에서 각각 다른 총독이 파견되어 사실상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13개 식민지들은 영국을 도와 1756년부터 랑스-인디언 동맹과 7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1940년에 발표한 소설이고, 전쟁의 잔혹함과 비인간성을 생생하게 고발한 작품입니다.세계적인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여주인공을 맡아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토마스 페인의 ‘상식’을 말씀드리겠다고 지난주에 말씀드렸는데 순서를 좀 바꿔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이된 스페인 내전과, 내전에서 승리한 프란시스 프랑코가 철권통치로 얼마나 잔혹한 독재를 했는지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프란시스 프랑코는 20대 초반에 아프리카 북부 모로코 게릴라전의 장교로 용맹을 떨치며 명성을 얻었고, 계속 승진하여 33세에 장군으로 진급하면서 나폴레옹 이후
[일간투데이 임수진 보훈교육연구원 연구원] 국민의힘 신임 당대표로 선출된 이준석 대표는 공식일정의 첫 주제를 '보훈과 안보'로 정하고 지난 14일 대전현충원을 찾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천안함 유족을 만나 "보훈에 관해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을 반성한다"면서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앞서 지난 5일 현충일을 맞아 서울현충원을 방문한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는 "6·25전쟁과 월남전의 영웅이신 채명신 장군과 5·18민주항쟁 당시 계엄군의 발표명령을 거부한 후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경찰영웅 안병하 치안감을 참배했다"며 "두 분은 진정으로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국가영웅'"이라고 말했다. '국가보훈'의 주요한 가치로 '독립·호국·민주'가 거론된다. 이에 따라 국가를 위해서
아돌프 히틀러는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6000만 명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광기와 집착으로 전 세계는 끔찍한 재앙을겪어야만 했습니다.히틀러는 1889년 독일 국경부근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3세에 아버지를 잃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1905년 실업학교를 중퇴하고 미술대학에 지원했지만 재능을 인정받지 못해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18세에는 어머니를 잃고 물려받은 약간의 유산과 그림엽서 등을 팔면서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활했습니다.이시절 도서관에서 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