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병 정치평론가/정치학박사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백성(百姓)이라니? 글 시작부터 언짢아 하는 독자들이 계실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단순히 국민을 예스럽게 표현했을 뿐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처지를 보면 국민이나 시민 등 현대 민주정치에서 볼 수 있는 국민주권(國民主權)의 그런 개념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선의 어느 한 시대, 절대왕권과 그를 옹위하는 문무 대신들,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탐욕스런 관료들 그리고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말 그대로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그런 시대를 그려본다. 아 또 있다. 당시도 국왕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정치는 국왕의 총애를 받던 환관들이 주름을 잡았다. 오직 왕의 눈치에만 반응하고, 왕과 가까이 있을수록 권력이 셌던 그런 시대였다. 정치는 왕명에 따라 시작되고 왕명에 따라 끝났다. 절대왕정의 시대가 그랬다.

2013년을 보내면서 조선시대 절대왕정을 떠올릴 정도로 정치사회가 피폐돼 있다. 민주주의 국가도 이럴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없이 하게 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는 대화와 협상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대의제를 바탕으로 정당정치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대화와 협상을 통해 사회의 다양한 갈등구조를 관리하고 조율해 가는 것이 정치의 가장 중요한 몫이다. 그 수준이 곧 민주정치의 수준과 동질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어느 때부턴가 대화와 협상이 거의 실종돼 버렸다. 그러니 정당이 있어본들 서로 만나면 매번 네 탓 공방 아니면 지루한 힘겨루기다. 갈등을 관리하고 조율하기는커녕 정당정치가 오히려 갈등을 촉발시킨다.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 정치가 거의 죽었거나 실종되었다는 표현이 맞다.

모든 권력의 중추가 대통령에게 집중돼 있다. 조선시대 절대권력 딱 그런 느낌이다. 그 주변에 왕명에 따라 권력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국민 아니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통치의 대상에 불과한 백성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왕의 총애를 받으면 별 볼일 없는 사람도 집권당 대표보다 더 큰 권력을 쥘 수 있다. 반대로 왕의 눈 밖에 나면 정치인생이 고달프거나 끝날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2014년 갑오년 새해를 맞는 지금 벌어지고 있다면 놀라운 일이 아닌가.

철도노조 파업도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 옳으냐 하는 일차적 판단은 논외로 하자. 애매한 법리논쟁에 매몰돼야 하고 그 논쟁마저 사태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분명한 것은 철도노조 파업이 이미 법리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수백명을 해고하고 파업 노동자들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는 뜻이다.

법치로는 단칼에 정리할 수 있겠지만 정치는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엊그제 서울광장에 추최 측 추산으로 10만명이 모였다. 그들은 절대권력에 저항하고 분노하는 시민들이다. 법치보다 정치로 봐야 한다는 뜻이다. 법치는 절대권력에 유리하지만 정치는 백성에 유리하다.

불행하게도 박근혜 정부는 그들과 싸우고 있다. 절대권력의 눈에는 그들 또한 백성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중간에 누가 끼어들어 중재 운운하는 것도 어렵다. 절대권력의 윤허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판국에 갈등 조정자로서의 정치의 몫을 말하는 것도 민망하다. 그렇다면 “누가 죽나 어디 보자”는 식일까. 물론 당장은 백성이 죽어날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천하의 절대권력도 4년 뒤면 물러나야 한다. 반면에 백성들의 분노는 더 커질 것이 뻔하다. 전투가 아니라 전쟁의 승패는 아직 예단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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