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 한겨울 엄동설한(嚴冬雪寒). 광교산을 오를 기회가 있었다. 하산길을 잘못 들어 헤매던 중 문득 양지바른 언덕빼기에 진달래 꽃이 피언 난 것을 목격했었다. 소한(小寒) 추위는 꾸어사라도 한다는 계절이었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소한으로부터 대한(大寒)까지의 보름동안을 5일씩 구분 삼후(三候)로 나눴는데 초후(初候)에는 기러기가 북으로 날아가고 중후(中候)에는 까치가 집을 짓기 시작하고 말후(末候)에는 꿩이 운다고 했다.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속담도 있듯 눈이 내리고 강추위가 극성을 부리는 15일 동안 만물이 봄을 준비한다는 의미가 깔려있는 듯하다. 오늘 대한, 눈 속에서도 피어나는 꽃 설중매(雪中梅)가 있다지만 진달래꽃이 피는 것은 일찍히 본 일이 없다. 이른 봄, 눈속에 빨갛게 웃는 꽃, 정결한 꽃, 사랑의 꽃, 하얀 눈을 이고 있는 소담스런 모습은 마치 고매한 여인의 자태를 보는 듯한 설중매와 달리 진달래꽃은 이미 꽃잎에 갖은 고난과 풍상을 지고 있는 듯 얼룩이 지고 순탄치 않은 모양이다.

우연찮게 종묘앞을 지나다 양지바른 곳을 골라 몇 무리의 노인들이 옹기종기 햇볕에 몸을 내맡기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젊어서는 민족상잔의 아픔 속에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냈고 또 잘 살아보자고 새마을운동에 몸바쳐 나라를 일으켜 세워 밥술이나 떠 먹을 정도로 만들어 놓았건만 나이 들어 오갈데 마땅치 않고 소일거리가 없어 고궁의 담벼락에 기대어 옛날을 회상하는 몰골은 측은하기만 하다.

할멈. 며느리. 자식에게까지 버림받고 송죽(松竹)의 절개는 엄동설한이 돼봐야 안다 하지 않았나. 사람의 절개가 변함이 있는가를 가늠하는 말이라고 했던가. 자식이 이처럼 푸대접을 할 줄 알았겠나. 어쩌다 오고가는 술잔 속 신세 한탄에 다시 열정이 솟는지 이야기꽃. 웃음꽃이 피누나. 하마 진달래 꽃이 피누나.

진달래꽃하면 중학생 시절 통학길 장승배기 고개의 산등성이에 피어난 꽃대궐을 잊을 수 없지. 연분홍빛 꽃무더기는 6.25참에 골짜기에 사람을 생매장시켜 죽어간 이웃들의 핏빛 원혼이려니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지. 또 고개마루에 세워진 월남 이상재 선생의 기념비를 타고 오르내리던 생각도 난다.

청년운동에 앞장섰던 월남 선생은 일제 치하에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였고 민중계몽에도 온힘을 쏟았다. 미국에서는 서재필. 윤치호와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를 창립하였다. 특히 월남 선생은 나라가 망해도 비관하지 않고 해학과 재치로서 일본 관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도 하였다. 젊은 이들에게는 삶의 지혜와 용기를 불어넣기도 하였다. 진실과 기백. 순정과 너그러움이 넘쳤던 월남 선생의 기념비를 타고 놀았던 추억은 송구스럽기만 하다.

월남 선생 기념비 서남쪽 방향으로 2km 지점에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이색) 선생의 묘가 위치해 있다. 지금은 문헌서원(文獻書院)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지만 어린시절 목은 선생의 묘지로 소풍을 갔다 보물찾기 시간에 명태 한 마리를 상품으로 받았던 기억은 더욱 잊을 수 없는 단골 레퍼터리이다.

진달래꽃 하면 무엇보다 민족시인 김소월을 빼놓을 수 없지.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1925년 ‘진달래 꽃’) 라고 읊조린다. 시에까지 등장하는 영변은 ‘핵밭’이 되었다지만 진달래꽃이 지천으로 많았나 보다. 또 소월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눈물 아니 흘리오리다”고 체념을 한다. 그렇고 말고 지나간 일들을 더듬어 본들 무엇하겠나. 따뜻한 봄이 오면 다시 만나보세. 고려시대의 ‘가시리’(작가 미상)도 있지 않나. “가시는닷 도셔 오셔서”

김지용 논설실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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