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타이틀매치나 프로레슬링 경기가 있는 날의 TV가게 앞은 마치 극장을 방불케 했다. 지나는 행인마다 발길을 멈추고 발굼치를 모로 세운 채 시청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또한 TV가 있는 집안은 문전성시를 이뤘던 것이 1960년대의 사회상이었다.

1884년 텔레커뮤니케이션 시대가 열리면서 인쇄매체에 의존하던 미디어는 일대 혁신을 이뤘고 더욱이 칼러영상이 문화 예술을 비롯, 과학 등 생활주변 전반에 까지 확산되면서 색채문화의 꽃을 피우는 결과를 낳았다.

르네상스이후 서구의 문명사는 고전주의의 바통을 이은 낭만주의가 기세를 올린데 이어 우주나 자연 또는 삶의 실재(實在)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모방하거나 재현 또는 표상하는 리얼리즘이 번창하였다.
20세기 들어 리얼리즘에 반기를 든 아방가르드(Avant-garde)를 앞세운 모더니즘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모더니즘은 근본적으로 반지성적이며 인간의 이성이나 일체의 도덕감 보다는 정열과 의지를 더 중시하게 되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발전하면서 부터는 전통이나 관습. 도덕을 무시, 단절하기에 이르렀고 전위적 실험성과 비역사성. 비정치성 등을 강조하는 조류가 만연하였다.
색채문화로 도배질한 TV는 이와같은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지성을 말살단계에 까지 근접시키고 있으며 저속한 오락프로. 비윤리적 드라마의 재탕. 삼탕, 흥미중심. 센세이셔널에 치중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지성은 점점 더 쇠퇴하여 가고 TV에 심취한 어린이는 갈수록 포악해 지고 있다.

미국에서의 폭력문화는 TV가 그 원인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온 바 있다. 16세까지의 어린이는 TV를 통해 알게 모르게 5만번이상의 살인장면을 보면서 자라고, 매년 9천번이상의 성행위 장면을 암시적으로 본다고 한다.
이같은 현상은 청.장년층에 까지 파급되어 바보상자에 얽매어 웃고 즐기며 마약에 홀린 듯 소일하는 인구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봄철을 맞은 이즈음 TV를 한번 꺼 보세요. 갑자기 창밖으로 밤하늘의 별이 듬성듬성, 달 그림자 아른아른, 추억을 넌즈시 건드리면서 자아가 보일 것입니다.

논두렁 타고 개구락지 잡으려 뛰어다니던 시절. 매케한 모닥불 피워놓고 오순도순 옛 이야기에 빠지던 시절. 뒷동산 이름 모를 꽃숲에 누워 청운의 꿈을 그리던 시절이 생각난다. 시인은 “개구리 울음소리가 쏟아진다/ 고향 개구리 울음소리는 다르다/ 산등의 생김새가/ 들꽃의 향기가/ 논배미 물고의 깊이가/ 미루나무 잎새 떨림이 달라/ 기우는/ 달빛도 다르니/ 합창 즐기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저리도 다르다/ 스피커가 달라/ 변한 귀가/ 변하지않은 소리를 기억하는” (고향. 함민복) 이라고 읊조린다.

빌 게이츠의 휴가프로그램엔 ‘생각 주간’이 있다고 한다. 한 해 두 차례 호숫가 근처 조용한 별장에서 일주일씩 칩거하며 미래를 구상한다고 한다. 10년 뒤를 내다보는 장기적 비전을 구상, 회사 경영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신규사업을 발표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한국 문단에 큰 족적을 남긴 박경리선생은 “자연의 종말은 우리 모든 생명체의 종말”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제 TV의 미몽에서 깨어나 자연의 품안으로 돌아가 지성적인 사고를 도출하는 광장을 활짝 열어야 할 시점이다. 과정철학을 발전시킨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Bergson)은 “사고인(思考人)으로서 행동하고 행동인(行動人)으로서 사고하자” 고 역설한다.

김 지 용(논설실장.시인)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