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미얀마지역 위안소 운영실태 美보고서 확인

[일간투데이 인터넷뉴스팀]

‘아침부터 자정까지 낮 시간엔 사병들을, 저녁엔 하사관을, 밤에는 장교들을 상대해야 했다.’

일본군이 직접 운영한 위안소의 실태는 처절했다. 해외에서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는 거짓말에 속아 끌려온 한국인 처녀들은 일본 군대 규정에 따라 엄격하게 운영된 위안소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위안부 소녀들(Comfort Girls)’은 ‘하우스 마스터(House Master)로 불리는 위안소장의 관리 아래 계급별로 정해진 시간대에 군인들을 맞았다.

미군이 버마(미얀마)에서 한국의 위안부 여성 20명을 생포해 위안소 운영 실태에 관한 종합보고서를 만든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미육군 심리전투단이 1944년 10월 작성한 ‘일본군 포로 매춘 심문 보고서 49호(Japanese Prisoners of War Interrogation on Prostitution 49)’는 일본 군대의 위안소 운영 실태를 보여주는 중요 자료 중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단편적인 내용만이 공개됐을 뿐 미군이 어떻게 이러한 종합보고서를 만들 수 있었는지, 그 배경과 세부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뉴시스가 15일 입수한 보고서 전문에 따르면 미군은 미얀마 레도(Ledo) 지역에서 ‘위안부 소녀’들을 포함, 60명을 생포한후 이들에 대한 집중적인 심문을 통해 일본 군대의 위안부 운영 실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미육군 심리전투단의 일본계 미군 알렉스 요리치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서문(PREFACE)과 모집(Recruitng), 생활과 근로 조건(Living and Working Conditions) 등 12개 항목으로 나눠 위안소의 실태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제3자인 미군이 객관적인 시선으로 조사한 것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미군은 당시 일본 군대가 직접 위안소를 운영한다는 사실에 주목, 위안부 소녀들의 역할과 기능, 효과 등을 상세히 파악함으로써 대 일본군 심리전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위안부 소녀들이 일본 군대에 소속돼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위안소는 군대가 주도한 유례없는 인신매매 현장이었다. ‘위안부 소녀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했으며 빚을 진 부모를 위해 몇백엔의 선급금을 받고 해외의 새로운 생활을 꿈꾸며 배에 몸을 실었다. 이들은 군기지에 마련된 위안소에서 최소 하루 12시간 이상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고 공식적으로 쉬는 날도 없었다.

군인들의 화대는 계급에 따라 달랐으며 소녀들이 강제로 몸을 판 댓가의 50∼60%는 ‘하우스 마스터’가 빚을 갚는 명목으로 떼었다. 음식과 화장품 등 생필품도 하우스마스터를 통해 비싸게 구입해야 했다.

위안소는 사병들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1.5엔(20∼30분)에 이용할 수 있었고 하사관은 오후 5시부터 9시까지 3엔(30∼40분) 장교는 오후 9시부터 자정까지 5엔에 이용하도록 했다. 장교들은 돈을 더 내고 하룻밤을 자는 것도 허용됐고 해당 기지 부대장도 자주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위안소가 너무나 많은 군인들로 혼잡해지고 문제가 발생하자 헌병의 감시 아래 기갑, 공병, 의무대 등 부대별로 요일을 지정해 이용토록 변경하기도 했다.

한국의 위안부 소녀들이 생포된 것은 1944년 8월15일 미얀마와 인도 접경지대의 레도(Ledo)로 이들은 인근 스타케이드에 주둔한 일본 군대가 관리하는 ‘위안소’에서 2년 이상 생활하고 있었다. 8월10일 생포된 20명의 위안부 소녀들은 스타케이드로 이송돼 8월20일부터 9월10일까지 3주 간 심문을 받았다.

서문에서 “위안부는 일본 군대에 소속돼 군인들을 위해 일하는 매춘부 혹은 직업적 종군 민간인이다. ‘위안’이라는 단어는 이상한 단어다. 일본 군대를 위해 싸우는 곳은 어디든지 위안부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금번 보고서는 미얀마의 부대에 소속된 한국인 위안부들에 관한 것이다. 일본은 1942년 미얀마에 이 소녀들 중 일부인 703명을 배에 태워 보냈다”고 밝혔다.

다음은 보고서의 주요 내용.

▲ 어떻게 모았나

1942년 5월 초 일본 정부를 대행하는 에이전트가 일본의 새로운 점령 지역인 남아시아에서 ‘위안 봉사’를 맡을 여성들을 ‘징집(enlist)’할 목적으로 한국에 왔다. ‘서비스’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지만 병원에서 부상자에게 붕대를 감고 군인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과 관련 있는 것으로 소개했다. 이들의 유인책(inducement)은 돈을 많이 벌고 가족들의 빚을 갚을 수 있으며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잘못된 말을 믿고 많은 소녀들이 몇백엔의 선금을 받고 왔다.

대부분의 소녀들은 무지했고 교육받지 못했다. 이들은 종군 기지에 소속되는 규정에 근거해 선불금 형태로 진 가족들의 빚에 따라 6개월에서 1년의 계약 기간을 맺었다.

이런 식으로 징발된 약 800명이 일본인 ‘하우스 마스터’과 함께 1942년 8월20일 랭군(현 양곤))에 왔다. 8명에서 22명의 그룹으로 나눠진 이들은 미얀마의 다양한 지역에 분산됐다. 소녀들이 온 곳은 미얀마 북부 미치나(Myitkyina)로 일본 군대기지 근처 꽤 큰 마을이었다. 쿄에이와 킨수이, 바루신로. 모모야로 불리는 4개 위안소에 수용됐다. 쿄에이 하우스는 일명 ‘마루야마 클럽’으로 불렸다. 마루야마는 이곳 기지의 사령관 이름이었다.

▲ 위안소 생활

미치나에서 소녀들은 2층짜리 하우스에 수용됐는데 본래 학교 건물이었다. 네 개로 쪼갠 방에 한 명씩 배정돼 그곳에서 먹고 자고 몸을 팔았다. 음식은 ‘사감’이 구입해 제공됐고 미얀마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이었다. 옷과 신발, 담배, 화장품을 살 수 있었고 사병 및 장교들과 함께 체육을 하고 소풍과 여흥에도 참가했다.

▲ 위안소 어떻게 운영됐나

위안부소녀들의 '비즈니스'는 일본군에 의해 통제됐다. 일본군은 이용 가격과 우선권, 계획 체계 등을 아래와 같이 만들었다.

1. 사병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이용. 20∼30분 요금 1.5엔
2. 하사관 오후 5시부터 오후 9시. 30∼40엔 3엔
3. 장교 오후 9시부터 밤 12시. 5엔

▲ 요일별로 위안소 이용 지정도

위안소가 너무 많은 군인들로 붐비자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병들은 많은 장소에서 그들에게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고 시간이 지체될 경우 바로 나가도록 엄격히 통제됐다.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군은 요일별로 특정 부대를 위한 날들을 만들었다. 특정한 날 보통 부대당 두 명이 서비스를 받게 했고 헌병이 질서를 통제하도록 했다. 다음은 18사단 예하 부대들을 위해 위안소 쿄에이 하우스에 편성된 스케줄이다.

일요일 18사단 사령부 부대원

월요일 기갑부대
화요일 공병부대
수요일 휴무. 주간 신체검사
목요일 의무대
금요일 포대
토요일 수송대

하지만 장교들은 일주일 내내 이용하는 것이 허용됐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와서 가격을 지불하고 위안소 이름이 적힌 2인치 크기의 티켓을 받았다. 줄을 선 다음 각각의 신분과 계급을 기재했다. 종종 만취한 군인들 있었기 때문에 위안부 소녀들은 이들을 거부할 권한이 허용됐다.

▲ 지불과 생활 조건

‘하우스 마스터’는 소녀들이 계약 당시 진 빚에 따라 수입의 50∼60%를 차지했다. 매달 소녀들은 평균 1500엔을 벌었지만 최소 750엔 이상을 떼었다. 많은 하우스마스터들이 음식과 생필품을 소녀들에게 비싼 값에 공급했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웠다. 1943년 말, 이곳에서 빚을 갚은 일부 소녀들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다.

위안소엔 모든 종류의 피임 기구들이 준비됐다. 종종 군인들이 직접 피임 기구를 가져오기도 했다. 군의관이 일주일에 한번 위안소를 방문해 병에 걸린 소녀들을 치료하고 격리하거나 병원에 보내도록 조치했다.

▲ 사령관도 위안소 이용

심문 과정에서 미치나 기지 사령관 마루야마 대령과 병력을 데려온 미즈카미 소장 두사람은 완전히 반대의 캐릭터였음이 드러났다. 전자는 완고하고 이기적이며 사병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역겨운 사람이었고 후자는 관대하고 친절하며 부하들을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대령은 위안소의 단골이었지만 소장은 한번도 간 적이 없었다. 미즈카미 소장은 1943년 가을 사병들을 대피시키지 못한 것 때문에 자살했다.

▲ 위안부 소녀들 생포 과정

7월31일, 3개 위안소의 소녀들과 보조원을 포함 63명의 그룹이 작은 배들을 타고 이라와디 강을 건너 와잉마우 근처에 닿았다. 8월4일까지 그곳에 머물렀지만 와잉마우엔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은 8월7일 일단의 군인들을 따라가다 소규모 전투를 통해 흩어졌다. 소녀들은 강둑을 따라서 가다 10일 영국인 장교가 이끄는 군인들에게 생포됐다. 이후 미치나를 거쳐 레도 스타케이드에 와서 심문을 받았다. 소녀들은 자신들이 생포된 얘기가 전단을 통해 일본군에 알려지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도움을 요청했다.

뉴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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