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김두호의 문화에세이

▲ 김두호 인터뷰365 발행인/영화평론가

길옥윤은 원로가수 패티김의 전 남편이다. 황폐해진 모습의 병약한 노인으로 일본에서 돌아와 휠체어에 실려 병원을 전전하다가 서울 강동구 한 병원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은 것이 1995년 봄날이다. 외롭게 떠났던 그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패티김과 화려했던 부부시절도 함께 떠올리며 당시 이혼에 대한 연민의 정도 함께 느낄 것이다.

그래서인지 언젠가 MBC-TV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 나온 패티김은 “당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부군과 헤어진 것이 아니냐”는 요지의 질문을 받고 “이혼하고 4년 뒤 재혼했고, 이혼 사유는 남편의 음주벽과 도박벽 때문”이라고 해명해 새삼 화젯거리가 됐다.

길옥윤은 박춘석 이봉조 김희갑 등과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가요무대와 음반시장을 움직이는 주력 작곡가였고 음악계의 실력자였다. 일본에서 재즈연주자로 활동하다가 1966년 귀국해 패티김에게 <4월이 가면>의 신곡을 선물하며 사랑에 빠졌던 그는 결혼과 함께 눈부신 스타 음악 커플의 신화를 만들어 나갔다. <사랑하는 마리아>는 일본에서도 히트곡으로 떴고 <이별> <사랑의 찬가> 등 부르는 노래마다 밤하늘의 폭죽처럼 터졌다. 무명의 혜은이도 길옥윤을 만나 <당신은 모르실 거야> <당신만을 사랑해> <감수광> 등 수많은 히트곡을 불렀다.

색소폰을 불며 수많은 히트 가요를 남긴 음악인 길옥윤이 시를 쓴 때가 있었다. 1982년 초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작곡 연주생활 35주년 기념-길옥윤 시화 초대전>에 초청을 받은 필자는 시를 쓴 그와 인터뷰를 했었다. “잠시 잠들었다 깨어보니 백발이 성성하더라는 옛말 같이 덧없이 이순(耳順)의 나이를 앞에 두었습니다. 화백님들의 도움으로 마련한 시화전에 소개한 시들은 저의 진실과 순수의 열정을 표현한 영혼의 분신 같은 언어들입니다.” 시화전을 열게 된 그의 인사말이다. 당대 화단의 대표적 화가였던 변종하 김재배 김충근 원문자 한풍열 우희춘 유종상 강지주 김환 전래식 김비함 안영일 서정철 신동우 화백 등이 길옥윤의 시화전에 참여했다.

시화전에 소개된 길옥윤의 시는 모두 35편이다. 대부분 슬픔에 잠겨있을 때, 우울하고 고독할 때 그리고 누군가가 간절히 보고 싶을 때 쓴 듯한 시였다. 그는 필자에게 시를 쓴 배경을 설명할 때도 그러한 심경을 밝혔다. 그가 평생 그리워하며 사랑했던 사람 중에 패티김과 사이에 낳은 딸 정아가 있다. 결혼 이듬해인 1967년생이니 지금은 이미 41살 중년여성이다. 그는 일본에서 재혼한 부인과 사이에 손녀 같은 딸 하나를 두었다. 그 딸도 만년에 그에게 삶의 유일한 꿈이고 희망이었다. 어린 딸이 그린 아버지의 초상화를 명함 뒷면에 박아서 가지고 다니며 자랑했다.

<형>이라는 시에는 현해탄을 오가며 방황의 삶을 살았던 동생 못지않게 사연이 많았던 형을 애절하게 추모하는 동생의 절절한 그리움이 마디마디 묻어있다. “시를 쓰고 싶은 때는 대부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독과 좌절에 빠져 있을 때였다. 시는 고통에서 나오는 독백 같다. 곁에 누가 있다면 시를 쓰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 것 같다.”

본명은 최치정. 1927년 소월의 시에 등장하는 진달래꽃의 고향 영변에서 태어났다. 치과대를 다녔지만 색소폰을 불며 음악의 길로 들어섰던 길옥윤은 시인이 아니라 영원한 음악인이다. 그는 패티김과 이혼 후 몇 차례 사업을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 귀국했다. 모두가 그의 곁을 떠나 제대로 쉴 곳도 없었다. 그는 중환자 병동에서 1995년 3월17일 썰렁한 새벽바람을 실려 어디론가 떠났다. 영결식에서 그의 흘러간 옛 아내가 찾아가 서울의 주제곡이 된 <서울 찬가>를 불러주며 작별했다.

김두호 인터뷰365 발행인/영화평론가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