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서울에 남기고 간 수많은 상처 가운데 하나가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조성한 소개공지(疏開空地)였다.

폭격으로 인한 불이 도시 전체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군데군데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폭 40~50m의 빈터를 만든 게 소개공지다. 회현동~서울역 구간의 퇴계로와 서울역~충정로 구간의 의주로 등은 소개공지를 광복 후 포장해 도로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소개공지는 건물을 허문 뒤 정리되지 않은 흉한 모습의 빈터로 방치되다가 한국전쟁을 맞았다.
전쟁이 끝나자 피란민들이 소개공지였던 빈터로 몰려들었다. 종묘 앞에서 필동까지, 경운동에서 종로까지의 소개공지에는 판잣집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또 이 일대에는 ‘종삼’으로 불리는 윤락가가 형성됐다.

서울시는 1952년 종묘에서 필동에 이르는 소개공지를 폭 50m의 도로 부지로 고시했다. 그러나 전쟁 후 이곳에 정착한 주민들은 도로 건설 계획을 폐지하고 자신들에게 땅을 불하해달라고 요구했다. 서울시의 반대와 도로 부지인 국유지를 개인에게 팔 수 없도록 규정된 법을 어기고 재무부는 땅을 야금야금 팔아서 60년대 말에는 도로 부지의 50% 정도가 사유지로 바뀌었다.

중구청에 근무하던 이을삼 계장이 66년 부임한 김현옥 서울시장에게 ‘대한극장 앞~청계천4가 간 계획도로 정비방안’을 보고했다. 폭 50m의 도로 부지 가운데 중앙 부분 20m만 도로를 개설하고, 양쪽 15m씩은 불법점유하고 있는 주민들이 지주조합을 만들어 건물을 짓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金시장은 곧바로 이 계획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무허가 건물 철거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건설부 도시계획위원회가 당초 도로 건설 계획을 변경해서는 안 된다고 제동을 건 것이다.

이미 서울시는 “이곳을 재개발해 건물을 짓고 지역주민들을 우선 입주시키겠다”고 약속하고 무허가 건물 2천동 중 3분의 2를 철거한 상태였다. 金시장은 도시계획위의 제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을 강행했다.

워커힐 건설로 가까워진 김수근씨에게 건물 설계를 부탁했다. 김수근씨는 윤승중.김석철씨 등과 함께 외국 건축사조를 과감하게 도입한 ‘입체도시’ 개념 아래 설계에 착수했다.

설계안은 ▶종묘에서 필동까지 약 1㎞에 보행자용 인공덱(deck) 설치 및 상가 배치▶1~4층은 상가, 5층 이상은 아파트로 하는 주상복합 건물군 조성▶보행자 전용 인공덱은 3층에 설치하고, 지상은 차로 및 주차공간으로만 사용하는 철저한 보.차도 분리 등으로 구성됐다.

이 설계안에 대해 67년 8월 2일자 중앙일보는 “마치 서울이라는 바다에 뜬 아파트라는 이름의 선박처럼 꾸며진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설계안에 담긴 원대한 포부와 달리 완공된 건물인 세운상가는 흉측한 모습이었다. 인공덱이 종묘에서 필동까지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지금도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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