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간첩 31명이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한 사건이 이른바 ‘1.21 사태’다. 인왕산 아래 필운동에 살고 있던 나는 그날 밤 요란한 총소리를 들었다. 김신조 등 수십명의 무장간첩이 휴전선을 넘어 세검정 삼거리에 이를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당시 서울의 방위망이 뚫린 원인 중의 하나는 서울의 북문인 자하문 밖 부암동·평창동 일대에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속한 서울 시가지 팽창에도 불구하고 이들 지역은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묶여 개발이 제한되는 바람에 주민 수가 거의 늘지 않았다.

청와대나 수도방위사령부 측이 인왕산·북악산 등 북쪽 지역의 개발을 억제해 시민의 출입을 막는 게 청와대 경호를 위한 최선책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1.21 사태는 서울 북쪽 지역에 대한 ‘개발 억제’ 방침이 ‘개발 촉진’ 정책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됐다.

김현옥 서울시장은 그해 2월 9일 ‘북악스카이웨이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자하문~북악산~정릉~미아리를 잇는 길이 6.7㎞, 너비 16m의 산간도로를 개설해 군용 도로 및 시민의 드라이브 코스로 활용하겠다는 것이었다.

金시장은 홍은네거리에서 북악산 뒤~정릉~미아리로 이어지는 제2순환도로 건설계획도 내놓았다. 이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평창동과 정릉을 가로막은 북악산에 터널을 뚫어야 했다. 金시장은 터널을 착공도 못하고 퇴임했지만, 북악터널은 71년 9월 완공됐다. 이런 조치들은 ‘세검정·평창동 일대를 개발해야 산악지대를 이용한 무장간첩의 침투를 막을 수 있다’는 1.21 사태의 교훈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68년 10월 말 북한 무장간첩 1백20명이 경북 울진군에 상륙한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이다.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한창이던 69년 새해를 맞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그해를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로 하겠다는 신년사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김현옥 시장은 ‘서울시 요새화 계획’을 밝혔다. 평화시에는 교통시설로 사용하고, 전시에는 30만~4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로 쓰기 위해 남산에 1.2호 터널을 뚫는다는 계획이 들어 있었다.

또 두 개의 터널이 교차되는 곳에는 5천~7천평 규모의 교통광장을 조성해 완전한 입체교차로를 만든다는 것이다.

삼일로에서 보광동에 이르는 길이 1천5백30m, 너비 10.15m의 남산 1호터널은 계획 발표 후 9일 만인 3월 13일 기공식을 가졌다. 이태원과 장충동을 잇는 길이 1천5백m의 2호터널 기공식은 4월 21일 열렸다. 사전 타당성 조사나 기본설계도 거치지 않고 착공한 것이다.

그러나 완공된 1.2호 터널은 당초 계획과 달리 교차하지 않았다. 교통광장도 없었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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