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이들은 한강을 변하지 않는 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일년내내 강 폭이나 수량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30년 전만 해도 한강은 노량진 쪽으로 붙어 가늘게 흐르다가 홍수 때만 넓어졌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곳곳에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선거유세 등 대중집회 장소로 사용되곤 했다.

한강 하류 용산·마포 나루터에서 당인리 앞까지도 보통 땐 넓은 백사장이었다. 이 백사장의 가운데에 홍수에도 가라앉지 않는 두 개의 섬이 있었다. 밤섬과 여의도다.

1916년 여의도에 간이비행장이 들어섰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이다. 민간비행장 기능은 61년 김포로 옮겨졌으나, 군용비행장 기능은 67년까지 계속됐다.

67년 9월 김현옥 서울시장이 발표한 ‘한강개발 3개년 계획’에 따르면 여의도를 1백26만평 규모의 도시용지로 개발토록 했다. 건설부와의 협의 과정에서 87만평으로 축소됐고 군용비행장 기능은 성남에 있는 서울공항으로 옮겨졌다.

물길을 막기 위해 여의도 둘레에 둑(윤중제)을 쌓아도 강물의 흐름이 원활하려면 인근 밤섬을 없애야 했다. 또 밤섬의 흙이나 돌을 사용해 둑을 쌓는 게 가장 손쉬웠다. 당시 밤섬에는 78가구 4백여명이 살고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마(馬)·판(判)·석(石)·인(印)·선(宣)씨 등의 집성촌이었다. 이들은 가구당 1천5백여만원을 받고 마포구 창천동의 연립주택으로 이주했다.

68년 2월 밤섬이 폭파됐다. 밤섬에서 나온 11만4천t의 돌이 여의도 윤중제 축조공사에 쓰였다. 장마철이 닥치기 전에 완공하기 위해 매일 철야작업을 했다.

인력은 하루 3교대로 투입됐다. 1백10일간의 공사 기간 중 金시장은 신들린 사람처럼 살았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여의도로 달려갔다. 4월에는 아예 여의도에 ‘이동시청’을 열어 시정을 봤다.

당시 토목공사 기술 수준으로는 하루 작업량이 최대 5만t이었다. 하지만 金시장의 호령과 질타로 하루 작업량이 10만t에 달했다. 5월 말까지의 여의도는 흙먼지투성이였다.

나는 윤중제 공사 현장을 떠올리면 ‘혈투’라는 낱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윤중제 착공 후 얼마되지 않아 국회에서 새로 조성되는 땅 약 10만평을 국회의사당 부지로 쓰겠다고 서울시에 신청했다. 여의도 입주 신청 제1호였다.

68년 6월 1일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한강건설’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가 쓰인 화강암 블록의 검은 휘장을 벗기는 것으로 여의도 윤중제 공사는 끝났다. 그리고 70년에 서울대교(현 마포대교)가 준공될 때까지 여의도 개발은 휴식기에 들어갔다.

한편 金시장은 윤중제 공사가 시작되던 무렵 김수근씨에게 여의도 시가지 개발 관련 도시계획안 수립을 맡겼다.

김수근씨는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생활방식과 행동이 보통사람과는 달랐다.
이런 金씨가 내놓은 여의도 설계는 이상적이라는 표현을 넘어 환상이었다.

당시 수준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비현실적 작품’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넘은 지금에도 실현하기 어려운 설계라고 여겨진다.

그의 작품은 일본 건축가 단게 겐조가 60년 설계한 ‘도쿄계획 1960’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됐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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