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4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김현옥 시장이 물러나고 양택식 시장이 부임했다. 梁시장의 당면 과제는 바닥 난 시 재정을 확충하는 것이었다. 梁시장이 부임하면서 나는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서울시 기획관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서울시 재정 상태는 ‘제때 봉급을 줄 수 있을까’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 같은 재정 악화는 金시장이 벌여놓은 수많은 사업에서 비롯됐다. 특히 여의도 윤중제 건설이 주요 원인이었다. 윤중제를 쌓아 조성된 땅이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서울시 재정을 살릴 방안도 여의도에서 찾아야 했다.

나는 땅이 안 팔리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70년 8월 초 처음으로 여의도에 갔다. 눈 앞에 펼쳐진 80만평의 평지가 장관이었지만 내 입에서는 “아이고 이것을 어떻게 하나”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땅이 안 팔리는 이유는 도시계획 때문”이라는 동행한 시 직원의 말이 들려왔다. 그 때까지 김수근팀이 설계한 여의도 개발 계획안을 못 본 나는 곧바로 그 계획을 검토했다. 나는 기가 막혔다. 이런 계획으로는 땅이 팔릴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땅을 팔기 위해선 우선 거점 확보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시범아파트 입주자 모집에 나섰다. 시범아파트는 대지 3만3천여평에 24개동 1천5백84가구가 들어서는 대단지였다. 70년 9월부터 입주자를 모집했으나 신청자가 없었다. 梁시장을 비롯한 시 간부들이 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주며 시범아파트 홍보에 나섰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梁시장은 훗날 내게 “여의도 시범아파트 홍보물을 들고 거리에 섰을 때가 가장 비참했다”고 말했다.

결국 시 간부들이 앞장서 입주 신청을 했다. 내가 가장 먼저 신청했으며, 국장·과장·구청장 등이 뒤따랐다. 70년 9월 착공한 시범아파트는 다음해 10월 완공됐다. 아파트가 완공됐는데도 입주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아파트 주변은 사막과 비슷했고, 버스도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첫 입주민이 됐다.

그러나 아파트 준공과 더불어 초·중·고교가 문을 열었다. 나는 서울시교육위원회와 교섭해 여의도초등학교 졸업생은 무조건 여의도중을 거쳐 여의도고로 진학하도록 했다. 이른바 특수학군의 설정이었다. 이 정책이 여의도 아파트 단지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여기에 모든 신문과 TV가 당시 서울시내 아파트단지 중 최대 규모인 시범아파트를 집중 보도했다. 그러자 아파트값이 하루가 다르게 뛰었다. 여의도 아파트 건설에 뛰어드는 민간 업체도 잇따랐다. 이렇게 해서 여의도 땅이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인 도시계획안을 전면 수정한 것도 토지 매각을 촉진한 이유 중 하나다.

나는 김수근팀의 도시계획을 폐기하기로 하고 홍익대 박병주 교수에게 새 계획안 마련을 부탁했다.

한편 71년 봄 한 재일동교가 벚꽃 묘목 2천4백주를 서울시에 기증했다. 나는 梁시장에게 그것을 여의도 윤중제에 심자고 건의했다. 워싱턴 포토맥강변의 벚꽃거리 처럼 만들고 싶었다. 모든 시 간부가 주말에 묘목을 심던 기억이 생생하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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