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0월 말 “여의도 도면을 가지고 서울시장이 들어오라”는 청와대 지시가 내려왔다.

부랴부랴 달려간 양택식 시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여의도에 대광장을 만들라. 이른 시일 내에 계획을 세워 올리라”고 지시했다. 梁시장이 갖고 간 도면에 朴대통령은 직접 붉은 색연필로 구획선을 그었다. 길이 1.35㎞, 폭 2백80∼3백15m로 12만평 규모였다. 전혀 안 팔리고 있긴 했으나 여의도 내 요지 12만평을 광장으로 만들라고 하니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누구 명령인데 안 따를 수 있겠는가.

홍익대 박병주 교수에게 광장 설계를 부탁했다. 朴교수는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 앞 광장을 참고해 화단과 녹지를 적절히 배치한 설계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 설계안을 받은 청와대 측은 “다시 그려 올리라”고 지시했다. 일주일 뒤 올려진 두번째 설계안도 반려됐다. 또 다시 고친 설계안을 이번에는 梁시장이 직접 들고 朴대통령을 만났다. 설계 도면을 흘낏 본 朴대통령은 “이런 것이 아니고 포장만 해서 梁시장 이마처럼 훤한 광장을 만드시오”라고 주문했다는 것이다. 결국 朴대통령은 녹지나 화단이 없는 아스팔트 포장의 광장을 원한 것이었다.

광장은 71년 2월 착공돼 그해 9월 말 준공됐다. 완공 일주일 전쯤에 광장의 정식 이름을 정해야 했다. 梁시장은 청와대로 들어가기 전에 내게 어떤 이름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민족의 광장’이나 ‘통일의 광장’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돌아온 梁시장은 힘없는 목소리로 “5·16 광장으로 하라고 하셨어”라고 말했다. 생각해 간 이름을 꺼내기도 전에 朴대통령이 광장 이름을 정했다고 했다.

나는 전시(戰時) 군용비행장으로 쓰기 위해 광장을 만든다는 사실을 조성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야 알았다. 국군의 월남 파병이 잇따르고, 라오스·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공산화 도미노’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등 당시 한반도 주변 정세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또 70년대 전반기에는 ‘전쟁 발발, 서울 포기, 서울시민의 남쪽으로 피란’이라는 종전 방위 개념이 ‘수도 사수, 수도방위사령부 설치, 충무계획 수립·정비’로 바뀌고 있었다.

북한은 광장이 비행장임을 바로 알아차렸다고 한다. “북한이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나무로 만든 글라이더 20대에 2백여명의 특수공작원을 실어 여의도에 침투시킨다”는 첩보도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밤마다 광장에 수십개의 철책을 세워 비행기나 글라이더가 내릴 수 없도록 대비했던 적이 있다.

광장이 일반인에게 선보인 때는 71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였다. 이후 광장에서는 대통령 취임식, 국풍잔치, 이산가족 찾기 만남의 광장 등 1백만명 이상이 참가하는 각종 행사가 열렸다.

광장은 조순 시장 때인 97년 7만평 규모의 공원으로 개조됐다. 1백만명 이상이 모일 수 있는 탁 트인 열린 공간을 잃은 대신 평일에는 이용자가 거의 없는 거대한 공원을 1백억원 넘게 들여 조성한 것이다. 일부 시민의 비난과 김대중 대통령의 질책으로 서울시는 준공행사도 열지 못하고 슬그머니 개원했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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