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필자 프로필> ▶1928년 경주 출생▶69년 명지대 경영학사▶74년 단국대 행정학석사▶77년 단국대 법학박사▶52년 제2회 고등고시합격▶57년 경북 예천 군수▶60년 경북도청 선거지도과장▶63년 총무부 중앙공무원 교육원 교관▶70~75년 서울시 기획관리관.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75~78년 서울시 공무원교육원장▶78~94년 서울시립대 교수

어느날 점심을 먹고 들어오던 구자춘 시장이 시청 복도에서 나를 보더니 갑자기 "孫국장, 서울 도시계획에는 철학이 없어"라고 소리치고는 시장실로 들어가버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내게 시장을 수행했던 직원들이 시장과 점심을 함께 한 사람들 간에 오간 얘기를 들려줘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具시장은 김수근씨 일행과 점심을 같이 했다. 김수근씨는 김현옥씨뿐 아니라 具시장과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당시 具시장이 김종필씨의 오른팔이라면 김수근씨는 왼팔로 알려져 있었다.

그날 점심 자리에 김수근씨는 국민대 김형만 교수, 한양대 강병기 교수와 함께 나왔다. 식사 도중 김형만 교수가 "서울 도시계획에는 철학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서울은 지금 단핵(單核)도시로 모든 기능이 중구.종로구에 몰려 있다. 하루 빨리 도시구조를 다핵(多核)으로 바꿔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여의도.영등포와 영동.잠실을 각각 하나의 핵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 도시계획을 뜯어고치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具시장은 '철학이 있는 다핵도시론'을 듣고 엄청난 의욕이 솟구쳤다. 具시장은 '서울 3핵 구상론'을 실현하기 위해 서울시청을 영동지구로 옮기고, 대법원.검찰청.금융기관.고속버스터미널 등의 강남 이전을 구상했다. 이와 함께 강북 도심을 출발해 영등포~영동~잠실~왕십리를 거쳐 강북 도심으로 되돌아오는 순환지하철 건설을 결심했다. 바로 지하철 2호선 구상이다.

1975년 2월 초순 대통령 연두순시를 앞두고 具시장은 나와 도시계획과장.지하철건설본부장 등을 시장실로 불렀다. 우리가 삥 둘러 선 가운데 具시장은 지도를 펼쳐놓고 "구로공단 앞은 통과해야겠지" "서울대 앞도 지나야겠지" 하는 등 질문인지 독백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검은 색연필로 지도에 선을 그어 나갔다. 20분 정도 지나 둥근선이 만들어지자 具시장은 "자! 대통령 연두순시 준비는 이것으로 해. 3핵 도시 조성과 지하철 순환선 건설이야."

누구도 순환선보다 방사선이 먼저 건설돼야 한다거나 그런 장거리 노선의 건설에는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반론을 펴지 못했다. 지하철 2호선을 순환선으로 건설한다는 具시장의 계획은 중앙정부의 정책을 바꾸는 것이었다. 70~71년 지하철 1호선 노선을 결정하면서 서울시와 교통부는 교통량 조사를 근거로 2~5호선 노선도 대강 결정해 뒀었다. 지하철이 어디로 달리는가는 노선 인근 지역의 이해와 직결된다.

따라서 노선의 선정과 착공.준공 계획은 엄격하고도 객관적인 기준과 많은 시민의 동의를 요구하는 일이다. 지하철 노선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이용 시민의 수다. 이 원칙에 따라 서울시와 교통부는 71년 지하철 1~5호선의 노선을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3핵 도시 구상에 깊이 빠져 있던 具시장에게는 원칙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결정하고 대통령의 재가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78년 3월 착공된 지하철 2호선은 84년 5월 전 구간이 개통됐다. 지하철 2호선의 파급 효과는 컸다. 77년 말~85년 사이 강북지역 인구는 32만7천명 늘어났으나, 강남지역의 경우 1백79만3천여명 증가했다. 이 중에서도 2호선이 지나는 영등포.구로.관악.동작.강남구에서만 1백26만6천명이 늘어났다. 지하철이 인구 증가 및 재배치에 끼친 영향을 실감케 하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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