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필자 프로필> ▶1928년 경주 출생▶69년 명지대 경영학사▶74년 단국대 행정학석사▶77년 단국대 법학박사▶52년 제2회 고등고시합격▶57년 경북 예천 군수▶60년 경북도청 선거지도과장▶63년 총무부 중앙공무원 교육원 교관▶70~75년 서울시 기획관리관.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75~78년 서울시 공무원교육원장▶78~94년 서울시립대 교수

요즘 일반적으로 ‘강남’이라고 불리는 강남.서초구 지역은 1963년 1월 1일 서울시에 편입됐다. 당시 강남은 대부분 배밭인 조용한 농촌었다. 63년 말 현재 인구는 2만7천명 정도였다.

서울시가 제3한강교 건설을 착수한 동기는 군사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때 피란의 아픔을 겪은 많은 서울시민은 ‘북한이 또 남침하면 어떡하느냐’며 걱정했다. 한국전쟁 당시 한강 다리는 제1한강교와 광진교 두 개뿐이었다. 전후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가 건설됐으나 전시 군사용으로만 쓰도록 돼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1백50만명이었던 서울 인구가 65년에는 3백75만으로 늘어났다. 북한이 다시 남침하면 이처럼 많은 시민이 두 개의 한강 다리를 통해 무사히 피란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66년 1월 19일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가 착공됐다. 그러나 대다수 시민은 착공 사실을 몰랐다. 전혀 보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다리가 훗날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는 땅값 폭등의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경부고속도로 출발점이 됐다.
‘강남’이라는 이색지대를 만든 근원(根源)이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도 윤치영 서울시장도 시공사인 현대건설도 이 같은 파장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공사가 석달 정도 진행됐는데 건설부에서 당초 설계된 왕복 4차로(폭 20m)를 왕복 6차로(폭 26m)로 확장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우리나라 전체 차량 수 2만7천대에 비춰볼 때 6차로 다리는 너무 넓었다. 건설부의 한 간부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평양에 놓고 있는 다리의 폭이 25m이므로 우리는 그보다 1m는 더 넓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설계를 고치고 기초작업을 다시 시작하였다.

제3한강교 착공 당시 평당 2백원 정도였던 강남구 신사동 일대 땅값이 1년 뒤 3천원으로 뛰었다.
현대건설 현장사무소는 강북과 강남 양쪽에 있었다. 강남쪽 사무소에 설치한 10㎾짜리 발전기가 강남 최초의 전기시설이었다. 또 강북쪽 사무소에서 교각에 철선과 전선을 묶어 가설한 강남쪽 사무소의 전화가 강남 최초의 전화였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67년 5월 3일 대통령선거 정견발표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 구상을 밝혔다. 이듬해 2월 1일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이 열렸다. 다음날 영동구획정리지구 시행공고가 났다. 제3한강교에서 남쪽으로 7.6㎞ 떨어진 곳에 있는 경부고속도로 용지 9만2천평을 무상으로 확보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 구간은 68년 12월 21일 개통됐다. 이듬해 12월 26일 길이 9백15m, 폭 27m의 제3한강교가 뚫렸다. 착공 땐 무관심했던 언론이 헬리콥터까지 띄워 준공 장면을 보도했다.

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됐다.

영동구획정리지구는 당초 3백13만평에서 점점 늘어나 5백20만평에 달했다. 70년대 후반 삼성동 상공부단지 조성 목적으로 제2구획정리사업도 시행됐다.

두 차례 사업을 통해 영동구획정리지구는 모두 1천만평에 이르러 여의도 넓이의 13배가 됐다.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