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전국민(全國民)의 참여 대업(大業)

(4)건설회사에서 왔다는 사나이 ― 노무자 구인단

음성으로 판명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들의 품팔이나 잡역 행상 등을 일반인(외부세계의)들이 환영할리 없었으므로 그들은 부락 안에서 생업이 될 만한 무슨 일거리든지 만들어서 자활의 방법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별다른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무렵, 고속도로 공사 왜관공구 중 일부의 시공을 맡고 있던 대한전척공사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일반 노무자들과 똑같은 조건으로 대우할테니 자갈 채취장에 나와서 일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일반인들 속에 섞여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지체부자유한 이들로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비상한 인내를 감수해야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공업자측의 부탁이 워낙 간곡했고 또한 부락의 살림형편도 결코 찬밥 더운 밥 가릴 계제가 못되었으므로 무턱대고 망설이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로부터 신동 마을의 ‘음성 나환자들’도 고속도로 건설의 역군으로서 한몫 참여하게 된것이었다.

한달동안 힘겨운 작업을 하고 나자, 이번에는 동아건설(당시는 동아건설산업합자회사)에서 새로이 요청이 왔다. 동아건설은 왜관읍에서 지천교 사이 12.8㎞의 시공을 맡고 있었다.

이때 신동 마을의 개발위원장인 김보상씨는 동아건설 측과 업무계약에 관한 사전 협상을 벌였다.

“우리 부락민은 내가 지휘 통솔하겠습니다. 나에게 십장을 시켜 주시오. 그러면 우리는 최대의 작업능률을 올려서 당신네 회사도 돕고 국가사업에도 적극 협력하겠습니다” 동아건설이 이를 받아들였으므로 신동 마을의 남녀노소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고속도로 건설사업에 참가했다.

부락에서 가까운 신동천에 매일 몰려나가, 아침부터 밤까지 자갈을 캐고 또한 이것을 규정된 크기로 깨어 따로따로 쌓아놓는 고된 작업이었다. 괭이·망치·소쿠리·어래미 따위의 도구가 있는대로 동원되었고 그것들을 사용하여 4푼·5푼·6푼자리의 자갈을 조금씩 생산했다.

경험도 없고 체력도 달리는 불리한 여건을 무릅쓰고 작업을 강행하기 2개월. 그런데 불행히도 이 2개월간의 생산품이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고속도로공사용 골재로써 부적당하니 골재원을 다른 것으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물론 자갈의 질이 좋고 나쁘고는 애당초 작업원들이 간여할 사항이 아니므로 이들이 품삯을 손해볼 이유는 없었다. 다만 골재원을 옮긴다면 어디로 옮기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을 따름이다.

칠곡군 북삼면 보손동천-이곳이 새로이 결정된 채취 장소였다.
북산면 이라면 신동에서 자그만치 30㎞나 떨어진 먼 곳이다. 그리고 30㎞라면 물론 타관이다.

일반인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신동 고개의 ‘환자들’에 있어서는 그 곳은 더더구나먼 타관땅이었다.

십장 김씨는 마을의 청장년 층에서 지망자를 뽑았다. 40명이 지망했다.

바야흐로 삼복더위의 불볕이 쏟아지려 하는 7월 초, 이들은 취사도구를 비롯한 간단한 생활 용품들을 보따리에 싸서 짊어지고 마을을 출발, 북삼면으로 가서 보손동의 냇가에다 집단 천막을 쳤다. 부인네들도 몇 사람 함께 갔다. 부인네들은 취사와 세탁을 맡는 한편, 남편들의 작업도 거들기 위함이었다.

골재는 1㎥ 단위로 계산한다. 자갈 1㎥는 처음에 3백원 정도 했다. 나중에는 4백원씩으로 값이 올랐으나, 건장한 일군이 쉴 사이 없이 악착같이 꼬박 매달려야 한 사람이 하루에 2㎥를 칠 수 있었다. 부자유수런 몸으로 골재를 채취하는 이 작업은 뼈를 깍는 고역이였다.

사지가 튼튼한 장정인 경우 밤에도 횃불을 밝혀놓고 중노동을 감행하여 하루 4㎥를 생산한 예도 없지는 않으나 대부분의 작업원은 일당 6백원 혹은 7백원의 벌이로 만족했다.

이렇게 두달 동안을 보손동천에서 일하고 신동 마을의 일꾼들은 그해 9월 중순에 일단 철수했다.

삼복 더위를 뙤약볕 쏟아지는 자갈밭에서 보내고 마을로 돌아온 일꾼들은, 그러나 한동안 마음놓고 푹 쉴 수도 없었다.

동아건설의 간부가 재차 찾아와서는 공사장에 일손이 모자라 야단 났으니 제발 와서 도와 주어야 되겠다고 다급한 사정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골재 생산이 아니라 고속도 본공사인 노면작업 혹은 절토부 정리작업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김보상씨는 이를 수락하고, 9월말부터 매일 40명씩의 일군을 공사판에 동원했다.
품삯은 4백여원, 골재를 칠때 보다 약간 밑도는 보수였으나 다른 일반 노무자들도 그렇게 받고 있었다. 처음 한동안은 회사에서 내주는 트럭이나 통운트럭을 이용하여 일터에 나다니다가 그후 시외버스의 일반 승객들은 신동 고개 마루턱의 정류장에서 이들이 승차하면 낯을 찡그리곤 했다.

이 도로 공사장의 작업은 엄동이 닥칠 무렵인 그해 11월 초까지 계속되었다.
본공사인 노면 작업이 진행되는 한편으로 골재는 골재대로 계속 필요했으므로 신동 마을의 주민 가운데 일부는 다시금 북삼면의 냇가에서 천막 생활을 해야 했다. 이에는 20명이 동원되었다.

김보상씨는 더욱 바빠졌다. 골재 취재반의 책임자로 정명복 청년을 임명하고 김씨는 자신도 사흘에 한번 꼴로는 북삼면 채취장을 둘러보며 부락민 일군들은 독려했다. 이때는 골재 값도 5백원씩으로 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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