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구영 편집국장

한국 경제가 저성장·저물가·저금리라는 ‘신3저’ 현상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국내외 전문가들은 지금 같은 불황 국면이 지속되면 일본식 ‘장기 불황’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하고 나섰다.

이미 일본식 장기 불황에 접어들었다는 의견도 나왔다.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은 "한국 경제는 일본식 불황의 초입에 이미 발을 들여놓았다"고 경고했다. 금리를 낮추고 기업들에 대한 투자 독려책을 내놓는 등 정부가 여러 조치를 취했지만 경제엔 돈이 돌 조짐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활기는 떨어져 가고 있다. 바로 이 상황이 일본식 불황의 초기 증세라는 것이다.

실제로 경제정책 헛발질과 정치권의 리더십 실종이 장기화되면서 국민들은 잘해볼 생각조차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지켜보고만 있는 상황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경제살리기에 총력을 다할 때라며 ‘경제’ 단어를 무려69번이나 언급한 것은 이런 위기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식 장기불황에 대해 사이토 세이치로(齋藤精一郞) 일본 릿쿄대 교수는 1999년 ‘일본 경제 왜 무너졌나’라는 책에서 이를 ‘극장화의 함정’으로 진단했다. 허구한 날 반복되는 정쟁, 정권마다 쏟아내는 경제대책에도 나아지지 않는 생활고에 일본 국민들이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듯 남의 일처럼 여기게 됐다는 얘기다.

경제정책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사이 정치권은 파벌싸움에 몰두했다. 일본의 버블이 꺼지기 시작한 1989년 이후 2000년까지 14년 동안 총리가 10명이나 바뀌었다. 이는 시간과 장소만 바꿔놓으면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는 듯하다.

■남의 일 보듯 하는 '극장화의 함정'

우리 경제 상황도 그리 다르지 않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취임 후 이미 네 차례에 걸쳐 굵직한 경기부양책을 쏟아냈다. 그러나 반짝하던 부동산·주식시장이 하락세를 보임으로써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불신만 쌓여 가고 있다. 세계 10위 권의 경제대국이 됐지만 한국은 지난 3~4년 사이 성장이 멈춘 갈등 공화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경제계는 단군 이래 처음 겪는 현상이라며 전전긍긍 하고 있는데 정작 대책을 세워야 할 정치권과 소비주체인 국민들은 남의 일 보듯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두가 지금이 위기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 경제가 올해 들어 3분기 연속 성장세가 주춤하면서 그나마 한국의 경제성장을 떠받치던 수출이 급감하고 있다. 그에 따라 일각에서는 내년 초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0%대를 기록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FRB)는 30일 이틀간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후 양적완화(QE) 정책을 완전하게 종료한다고 밝혔다.

연준은 최근 국제 금융시장의 유동성, 유로존 경기침체, 인플레이션 약화 전망 등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회복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연준의 양적완화가 완전히 종료됨에 따라 이에 대한 후폭풍이 글로벌 경제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양적완화 중단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불안정해지고 시중금리가 급등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양적완화 종료와 함께 금리인상이 이뤄지면 신흥국에 몰린 자금이 대거 빠져나가는 이른바 외국인 자금 ‘엑소더스(대탈출)’가 시작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앞서 미국 통화정책이 급변하면 아시아 국가 가운데 한국이 충격을 가장 크게 받을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또한 미국의 금리가 상승하면 우리나라의 금리도 오를 가능성이 높다. 이는 기업과 가계의 대출 이자 상환 부담이 커진다는 의미다.

하지만 최경환 부총리는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이 충분하고 경상수지 흑자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경제가 받게 될 여파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밝혔다.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은 "후손들에게 빚을 물려주는 일이 되더라도 적극적으로 국채를 발행해 대규모 공공사업에 나서야 한다"며 "이게 침체된 경제를 물려주는 것보다는 낫다"고 강조했다. 또 윤창현 금융연구원장은 "지금 독일은 과거 긴축의 부작용으로 인한 인프라 시설의 심각한 노후로 고민하고 있다"며 "국내 안전 투자 확대 요구 등을 기회 삼아 선제적인 관련 투자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가계와 기업이 소비와 투자를 하게 하려면 정부가 '돈 쓸 거리'를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눈에 띈다. 우리 경제의 장점인 ICT와 함께 교육, 관광, 의료, 예술 등 분야에서 얼마든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데 '이념적'인 이유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는 게 많다. 경제 심리가 더 악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는 적극적으로 비전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구영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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