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言)에는 수준이 있다. 개인이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인격(人格)이 묻어나고, 국민이 어느 정도의 언어생활을 하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수준이 평가된다. 국격(國格)이다. 왜? 말은 소통의 핵심 도구이기에 그렇다.

그뿐만 아니다. 인간 존재의 근원인 생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김춘수는 그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했다. 꽃이라는 사물에 꽃이라는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꽃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사람이 언어를 사용하고 그 언어로 대상을 호명하는 행위는 사람의 욕망이 개입된다는 것을 시인은 사유하고 있다. 사람들은 표현되는 말을 통해 인정받고 사랑받으면 존재감을 넘어 그 이상의 기쁨을 느낀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입 닫고 혀를 감추면 몸이 편안하다” 교훈

하지만 같은 사람이 말을 해도 대상과 사물, 환경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옳다 그르다를 떠나 언어에는 자의성(恣意性)이 있기에 그렇다. 사람이 ‘꽃’이라고 했기에 꽃일 뿐, 애초에 ‘나비’라고 불렀다면 나비로 불리고 있을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에 “도를 도라고 불러 되겠지만 늘 도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사물의 이름은 지금의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지만 늘 그렇게 부를 필요는 없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는 말이 나온다. 언어는 그 이름이 항상 고정돼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사리가 그렇다 해도 말은 신중해야 한다. 언어는 의사교환의 수단이자 사물의 의미를 규정하거나 그 의미를 확정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많은 다언(多言)이나 준비되지 않은 말, 곧 실언(失言)은 예상하지 못한 후유증을 낳는다. 그래서 당나라의 풍도(馮道)는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가는 곳마다 몸이 편안하리라(閉口深藏舌 安身處處宇)”고 말조심을 당부했다.

사리가 이러한데도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의 말실수가 끊이질 않고 있다. 말은 한 번 뱉어놓으면 주워 담지를 못하기에 후폭풍이 크다. “모든 재앙은 입에서 나온다(禍生於口)”고 ‘명심보감’은 경책하고 있음에도 계속되고 있다.

근래 정치혐오를 부르는 ‘막말 시리즈’를 보자. #1. “(메르스 대응 관련) 박원순 시장은 똥볼원순이에요. 똥볼을 세게 찬 거죠. 세게 차서 경각심이 일깨워진 거지 박 시장이 찬 볼이 정확하게 골대로 들어간 게 하나도 없어요.”(하태경 새누리당 의원·6월 16일 CBS 라디오)
#2. “세월호 참사 책임을 대통령이 안 지고 총리에게 물으려 해서 바꾸게 된 게 도둑놈 총리(이완구 전 총리 지칭)라. 박근혜는 과연 부정당선된 놈답다.”(2월 16일·서화숙 새정치민주연합 윤리심판원 위원 트위터)

‘막말’은 혐오감 초래…언어 예절 지켜야

어디 이뿐인가. 여의도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막말·폭언은 정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난치병’ 수준에 이르렀다. 정청래 새정치연합 의원이 ‘공갈’ 발언, 친노(친노무현) 진영에서도 비난받은 김경협 새정치연합 의원의 ‘세작 발언’ 등을 꼽을 수 있다. 문제는 정치인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용성 전 두산중공업 회장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등이 비뚤어진 특권의식에서 비롯된 막말은 자신은 물론 모기업에도 치명적 손실을 끼쳤다.

대화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공동체를 살리는 활력소가 되는 말이 있는 반면 서로 눈을 흘기게 하는 갈등의 불씨로 작용하는 말이 있다. 불교 ‘잡보장경(雜寶藏經)’의 무재칠시(無財七施 : 재산 없어도 베풀 수 있는 7가지 보시)에 “부드럽고 다정한 말로 상대방을 감동시키고 즐겁게 한다”는 ‘언시(言施)’가 들어 있다.

그렇다. 지혜로운 혀는 세상을 선하게 하고, 어리석은 혀는 제 몸을 베는 법이다. 남의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잘 들으라는 경구도 그래서 나왔다. 9㎝밖에 안 되는 혀가 90평생을 좌우한다. 훌륭한 말을 남기라는 뜻의 ‘입언(立言)’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자. 막대한 파급력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거름망이 없는 인터넷 시대다. 이런 때일수록 막말과 비속어가 일상화된 품격 없는 말이 설자리가 없도록 언어예절을 되살리기 위한 사회적 합의와 실천의지가 절실하지 않은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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