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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국 화교 그 애잔한 이름황남엽 (협성대 교양학부 조교수)
[인천=일간투데이 김상규 기자]

건강한 다문화 사회를 주제로 7회에 걸친 연재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머리를 스친 대상은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종종 접해 온 화교들이었다.

내가 어릴 적 부모님 손을 잡고 찾아가던 음식점 중에 아직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어느 중국인 아저씨가 운영하던 조그마한 만두집이다.

우리가 흔히 중국음식점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자장면인데 그 집은 특이하게도 여러 종류의 만두만을 파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만두전문점 같은 곳이었다.

울긋불긋한 중국 토산품들로 소박하게 꾸며진 가게 모습이 어린 나에게는 이국적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무엇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풍채 좋은 중국인 아저씨가 만들어 주신 적당히 촉촉하고 풍미 깊은 만두의 맛이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그 깊은 맛은 아직도 강렬하게 내 입속을 맴돌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그 중국인 아저씨는 호방한 웃음과 특유의 왁자지껼한 어투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잔잔한 웃음을 주기까지 했다. 그 기억이 인상적이어서 필자가 영문학도로서 아시아계 북미소설을 연구하면서 접하게 된 작품에서 중국계 이주자들의 모습을 엿 볼 때마다 내가 어렸을 때 본 그 후덕하고 부지런하던 만두가게 아저씨가 스쳐지나가곤 한다.

그러나 북미소설작품에서 묘사되고 있는 영미권 화교들과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줄여서 韓華라고 한다)들이 처한 상황은 분명히 다르다.

혹자는 세계의 유수 대도시 중에 차이나타운이 없는 서울은 대단히 예외적인 사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울에 중국인의 집결지라 할 수 있는 차이나타운이 부재하고 있는 상황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화교의 발생기원과 이민정책의 결과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북미대륙의 경우 골드러시로 인한 서부개척을 위해 동·서부를 연결하는 대륙횡단 철도 공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공사에 필요한 값싼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중국 광동 지방의 흔히 쿨리(苦力)라고 불리는 하급 노동자들을 대거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폐쇄정책과 개화정책 사이에서 몸살을 앓던 과도기적 상황에 있었고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민자들을 공개적으로 수용하는 정책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우리나라의 화교의 기원은 1882년 임오군란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당시 중국인 오장경(吳長慶)이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청국 군사 4000명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이때 이들의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따라 들어온 청나라 상인들로부터 화교의 정착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이민족에게 배타적이던 우리 민족에게 청나라 상인들은 불청객일 수밖에 없었고 강인한 생활력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해가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나라 국민들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위화감으로 작용했다.

결국 그들은 우리 민족의 반목과 질시의 대상으로 추락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나라 화교의 유입은 우리가 원하지 않은 타율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각기 다른 역사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시아계 북미소설에서 만나는 화교들과 우리나라의 화교들 간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주재국의 끊임없는 배척과 눈에 보이지 않는 반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재국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늘 노력하여 왔고 그 노력의 배후에는 그들의 보이지 않는 눈물이 서려 있다는 것이다. 북미의 경우 대륙횡단 철도 공사에 동원된 1400여명의 화교 노동자들 중 10%에 달하는 140여명이 노동 현장에서 사고로 사망했고 그들의 유골은 변변한 무덤조차 없이 깊은 계곡 속 건설현장에서 아무도 모른 채 버려졌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화교들은 일본의 의도적인 이간질로 인해 우리 민족과의 잦은 충돌을 빚을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한 우리 백성들의 테러와 습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질곡의 역사 속에서도 화교들은 주재국의 지배 정책에 순응하면서 오히려 그들 스스로 주재국을 제2의 고향으로 받아들이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주재국의 경제발전이 곧 자신들의 발전이라는 생각으로 납세를 비롯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해 왔던 것이다.

비록 우리 정부의 배타적인 정책으로 인해 서울에 그들의 삶의 현장이라 할 수 있는 차이나타운이 조성되지 못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이며 미래의 동반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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