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정세가 격랑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총재인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여당이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한 안보법안을 국회에서 강행 처리했다. 이에 따라 동북아 안보지형에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당장 한국과 중국은 일본의 향후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반도와 동북아를 둘러싸고 군비 경쟁이 가속화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중·일 간에 자칫 센카쿠열도(尖角·중국명 댜오위다오)를 중심으로 국지전 발생 가능성도 예측된다.

무엇보다 북한의 전면적 도발이 일어날 경우 1945년 해방 이후 일본군이 다시 한반도에 들어올 가능성도 완전 배제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북한 문제를 잘못 처리해 무력 사용이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한 경우 반드시 승리하기 위해 한·미 연합군의 힘만으로 부족함을 느낀다면 일본의 도움도 받아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미군의 전투력에 큰 보탬이 될 수 있지만, 일본에 대한 한국의 우려는 이러한 경우를 방지하는 노력으로 대치돼야 하는 게 마땅하다. 그러기에 북한의 위협 때문에 일본 안보법안은 한국에 ‘양날의 칼’로 받아들여진다.

군사대국 디딤돌 놓은 日 안보법안 처리

아베 총리로 대표되는 일본 극우세력이 지향하는 ‘전쟁할 수 있는 나라’는 세계평화 실현이라는 시대 조류에 역행한다. 그러기에 영식 있는 일본 국민의 대다수는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반대에도 안보법안을 강행 처리한 아베 총리의 의도는 분명하다. 아베 정권의 숙원은 ‘전후 레짐(Regime·체제)으로부터의 탈각(脫却·벗어남)’이다. 전후 레짐이란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전승국인 미국의 일방적 강요에 의해 만들어진 평화헌법 9조에 따라 형성된 ‘자학(自虐)사관’이 만연한 일본을 지칭한다. 일본 우익세력은 현재의 일본이 미국의 반(半)식민지이고, 이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헌법을 개정해 명실상부한 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는 것이라고 줄곧 주장해 왔다. 아베 총리의 숙원은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가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 같은 견해가 뒷받침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와의 관계 설정이다. 한반도와 동북아, 세계정세에 줄 영향과 함의는 경제대국 일본이 가까운 미래에 군사대국으로 국제사회에 등장할 수 있음을 뜻한다는 점이다. 주변국과의 군비 경쟁 가능성도 커졌다. 한국 입장에서는 전략적 계산에 넣어야 할 또 하나의 군사대국이 이웃에 등장했기에 국가안위 수호 차원의 다양한 대응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 물론 주변국의 우려를 씻기 위해선 아베 정권이 이제라 안보법안을 폐기하는 게 옳다. 무력에만 의지하는 일본의 비참한 전철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힘에 통치는 생명이 짧다는 교훈을 보여주는 역사를 보자.

무력 의존은 생명 짧다는 역사 되새겨야

중국 한무제는 끝없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16세의 나이로 황제에 오른 무제는 선황제들이 다져놓은 경제적 풍요의 기반 위에 오·초7국의 난을 평정하는 등 제후들의 위협을 제거해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무력에 의한 과도한 정복전쟁에 몰입한 결과 말년엔 부자(父子) 사이에 군사를 일으키면서 태자가 죽고, 황후가 자살하는 등 가정의 참변을 겪다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이를 지켜본 노공왕(魯恭王) 유여는 “덕으로 상대를 굴복시키고자 하는 자 강한 사람이고, 재물로 상대를 굴복시키고자 하는 자 재앙이 따르며,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고자 하는 자 결국엔 망하게 된다.(以德勝人則强 以財勝人則凶 以力勝人則亡)”고 토로했다.

그렇다. 세상사 완력(腕力)에 의한 지배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아베 신조 총리로 대표되는 일본의 극우 지도층은 이런 이치에 눈을 감고 있다. ‘세계 어디서든 전쟁할 수 있는’ 집단자위권을 추진하는 데다, 이웃나라 식민지배와 전쟁범죄에는 ‘과거형 반성’을 하는 등 진정성이 결여된 사과를 하고 있다. ‘신뢰할 수 없는 일본’을 각인시키고 있다.

원폭을 맞고 항복을 선언한 일본은 승전국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경제대국의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들의 ‘피해’만을 내세우고 있다. 정작 한국과 중국, 동남아제국 등 자신들이 피해를 끼친 국민들에겐 진심어린 사죄를 피하고 있다. ‘중용’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음을 깨닫길 바란다. “자신에게 베풀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남에게도 베풀지 말아라.(施諸己而不願亦勿施於人)”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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