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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일본군의 대학살 현장, 분노만이 솟구쳐”무순 9.16참사유적지 참관, 記者로서 최초의 현장목격
1932년 당시 몰살된 3000여 주민들의 전신유골 보존
  • 류재복 기자
  • 승인 2016.02.2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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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만행이 새삼 드러나고 있다. 일본 군대는 1932년 9월 16일 중국 요령성 무순 평정산 일대에서 무고한 양민 3000여명을 집단 학살했다. 사진 왼쪽은 9.16 학살을 기획한 일본군 수뇌부. 사진 오른쪽은 당시 일본군이 집단으로 학살시켜 희생된 주민들의 처참한 유골 모습이다. 사진=류재복 중국전문기자

[일간투데이 류재복 중국전문기자] 3·1절 97돌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일본은 한 세기가 다 되도록 자신들이 저지른 살인, 강간, 고문, 방화, 약탈, 탄압 등 범죄에 대한 반성은커녕 오히려 과거사 미화에 나서고 있다. 한 술 더 떠 극우적 군사대국화의 길을 걷고 있어 동북아에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는 식민 조선에서의 만행에 이어 중국에서도 이어졌다. 세계인들은 일본제국주의 군인들의 중국 내 만행과 관련, ‘난징(南京)대학살’을 주로 기억한다.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국민정부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뒤 이듬해 2월까지 대량학살과 강간, 방화 등을 저지른 사건을 가리킨다.

‘난징대도살’로도 불린다. 약 6주 동안 일본군에게 30만명 정도의 중국인이 잔인하게 학살됐으며,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의 수도 8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 1932년 9월 16일, 제국주의 일본 침략자들은 중국 요령성 무순(撫順) 평정산(平頂山) 인근에서도 무고한 양민 3000여명을 무참히 살해, 암매장한 참극이 있었다. 일간투데이 류재복 중국전문기자가 국내 기자로는 처음으로 대학살의 현장을 취재했다. 참살 현장과 교훈을 소개한다.

   
▲ 당시 한 가족의 생활모습. 사진=류재복 중국전문기자

중국 요령성 무순 평정산 인근 마을. 때는 1932년 9월 16일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3000여명의 순박한 주민들을 모이게 했다. 그런데 불문곡직 남녀노소를 향해 기관총이 난사됐다. 일부 목숨이 붙어 있거나 도망치는 주민들에겐 일본도(刀)가 무자비하게 번뜩여 목숨을 앗았다. 그런 직후 사체를 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후 83년의 세월이 흘렀다. 희생당한 영혼은 물론 일부 유족들은 통한의 세월이었다.

2015년 12월 1일, 기자는 평정산 대학살 현장을 찾았다. 국내 기자로는 처음이다. 참사유적지기념관은 중국에서 중요문화재로 보호 관리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중국정부는 대학살 19년 뒤인 1951년, 참사발생지에 기념비를 세웠고 1970년에 참사발생 현장에서 참변을 당한 주민들의 유골을 발굴했다.

기념관 내에는 유골들이 참혹한 모습으로 그 날 일본군의 만행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었다. 기념관을 보존하는 목적은 ‘국치를 잊지 말고 평화의 중화를 진흥하자’였다. 일제에 희생당하고 수탈당한 우리 민족에게도 주는 교훈으로 받아들여졌다. 미래세대인 청소년들이 역사를 잊지 말고 무력이 아닌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을 배워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중국 무순은 요령성의 수도인 심양시 바로 옆에 있는 도시이다. 인구는 300여만명. 중국에서 보통 시(市)라 하면 500여만 명이 돼야하는데 이전에는 무순시로 불리다 현재는 심양시에 편입, 무순구 불리는 작은 도시다. 시내 중심가에는 운하가 흐르고 있어 그 옛날 이 도시를 붉은 피로 물들였던 비극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1932년 9월 16일, 제국주의 일본 침략자들은 중국 撫順 평정산 아래에 살고 있는 3000여명의 무고한 주민들을 그룹별로 모이게 한 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기관총과 칼로 무자비하게 몰살한 후, 그 사체를 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로부터 83년이 흐른 2015년 12월 1일, 필자는 취재차 平頂山 大虐殺의 현장을 찾았다.

   
▲ 당시 상황을 보도한 신문보도. 사진=류재복 중국전문기자

무순 평정산 참사유적지기념관은 중국에서 중요문화재로 보호관리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또한 애국주의 교육시범 기지임을 참관을 통해 기록으로 알 수 있었다. 1932년 당시, 대학살을 당한 중국정부는 19년 후인 1951년, 참사발생지에 기념비를 세웠고 1970년에 참사발생 현장에서 참변을 당한 주민들의 유골을 발굴하였다.

기념관 내에는 5m×80m의 넓이에 800여명의 유골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주로 부녀들의 유골로 시체를 태운 목재라던가, 휘발유통, 엄마와 아이가 바로 옆에 껴안고 있는 처참한 유골들이 그대로 생생히 놓여 있었다.

기념관내 진열관을 취재하면서 살펴보니 기념관을 보존하는 목적은 '국치를 잊지 말고 중화를 진흥하자'였다. 즉 평정산 참사의 역사와 진실을 생생히 재현하고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적 만행을 심각하게 세상에 폭로를 하면서 특히 청소년들이 역사를 명기하고 국치를 잊지 말며 중화진흥을 위해 분투하며 동시에 일본인을 포함한 모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일본제국주의의 본래 면모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이런 비극이 다시는 발생하지 못하게 방지하며 세계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날 필자는 이곳 평정산의 대학살 현장을 취재하면서 당시 우리 독립군들의 활동을 잠시 머리 속에 떠 올리게 되었다. 이곳 무순에서 일본군의 대학살이 있기 전 22년 전인 1910년, 한일합방이 된 후, 고려시대 부터 대대로 정승집안으로 내려온 삼한 갑부 이회영 6형제는 모든 재산을 팔아 국경을 넘어 당시 서간도 류하현 추가가에 안착, 신흥강습소를 만들었다.

이후 이 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 3500여명의 독립운동 무장 세력으로 키워내면서 김좌진, 김홍도 장군을 지원하여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대승을 거둔 사실, 그리고 그 후, 1920년, 일제 관동 정예군의 간도 대토벌로 수만의 우리 백성들이 학살을 당하면서 우리 민족은 연해주, 서간도로 흩어지게 되고 독립군들은 서간도 왕청문, 무순 일대에서 정의부, 신의부, 참의부를 거쳐 국민부를 만들고 천마산 유격대장 최시흥과 대한독립단 김원봉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창설하고 조선혁명군을 출범시켰다.

1931년, 중국에 일제의 만주 괴뢰국이 세워지면서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과 의암 유인석 의병장 6촌 며느리인 윤희순 여성의병장, 중국의용군 리홍광, 양동헌, 양희부 등 한.중 항일연합군은 서간도 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200회 이상의 치열한 전투를 벌렸다.

   
▲ 일본 정부에 배상 소송을 제기한 중국인들. 사진=류재복 중국전문기자

춘천에서 서간도로 이주해 온 윤희순 의병장과 양세봉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중국의용군 총대장 양동헌, 양희부, 이춘윤은 당시의 화력인 무순탄광을 일본군과 만주괴뢰군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을 때 윤희순의 항일 독립단에 속해있던 무순의 조-중 양민들의 도움을 받아 무순 대 탈환 작전을 감행했다.

이때, 화력과 군사력에 뛰어났던 일본군은 무순 독립단의 내부적 도움에 고전하고 있다가 대규모 일본관동군이 무순에 도착하자 한중 항일연합군은 열세에 밀려 산 속에 숨어 게릴라전을 펼쳤고 무순에 있는 조-중 양국의 백성들도 항일정신에 무장이 되어 투쟁으로 맞서자 일본군은 잠시 후퇴를 했다.

이후 양세봉, 윤희순과 중국 의용군들이 자리를 비운사이 일본군은 보복조치로 무순의 평정산 부근에 거주하는 양민들 3000여명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했다. 그 이유는 독립군을 지원했던 단체와 독립군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일본군은 계속해서 양민들을 고문, 학살하면서 독립군의 움직임을 알고자 했으나 이들은 절대 말하지 않았고 특히 12세의 어린소녀 김금녀도 일본군의 만행을 꾸짖으면서 잔인하게 숨져갔다.

그러나 일본군은 더욱더 잔인성을 보이면서 평정산 동굴에 양민들을 몰아넣고 무차별 총으로 난사하여 죽이고 또 일본도로 목을 베고 작두로 목을 자르며 죽인 시체에 기름을 부어 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날, 한 마을의 남녀노소 3000여 명을 모조리 몰살한 뒤 불에 태운 일본의 악행을 공개하고 있는 '무순 평정산 참사유적지를 돌아본 필자는 특히 어머니가 서너 살 된 아이를 껴안고 까맣게 불탄 유골을 볼 때 당시 우리 독립투사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 기념관에는 양세봉, 윤희순 등 조선인 의병장들의 활동기록은 발견할 수 없었다,

   
▲ 당시 주민들 학살에 사용된 각종 군도. 사진=류재복 중국전문기자

이곳 기념관에는 자신들의 선조들이 만행을 저지른데 대하여 사과를 하는 뜻으로 일본의 의원들이 평정신(平頂山) 사건의 생존자들에게 사과서한을 보낸 자료도 있었고 ‘아이하라 쿠미코’ 일본 참의원 의원은 무순시를 방문, 당시 학살에서 살아남은 왕자매(88)씨와 만나 거듭 “미안하다”고 말하고 일본 의원 24명이 서명한 사과서한을 전달했다고 신화통신이 보도한 사실도 기록으로 남겨놓고 있었다.

83년전의 참극현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중국 무순(撫順)은 요령성의 수도인 심양시 바로 옆에 있는 도시로 인구 300여만의 도시이다. 중국에서 보통 市라하면 500여만 명이 돼야하는데 이전에는 무순시로 불리다 현재는 심양시에 편입, 심양시 撫順區로 불리는 작은 도시다. 시내 중심가에는 혼하(渾河)가 흐르고 있는데, 마치 서울의 한강처럼 넓고 양쪽에는 새로운 고층 건물과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있어 아름다운 도시로 변모 돼 있다.

이곳 무순은 노천탄광으로 유명하여 바로 산 위에서 파 들어갔는데, “지금은 석탄이 거의 없고, 30여 개의 층층대가 이루어져 깊이는 80m 정도 이른다”고 동행한 김 룡 선생(장수돌침대 중국총재)이 말해주었다.

중국 정부가 단오 날, 조선족들에게 제일 먼저 공휴일을 준 곳이 바로 '무순'이다. “그런데 지금은 단오 날 ‘한국주간’(한국인들을 위한 행사)을 개최하여 조선족은 물론 한국인들이 대거 참여하는 마당이 되었다”고 김 룡 선생은 말했다.

그는 또 “무순에는 한족, 만주족, 몽고족들이 많이 살고 있지만 조선족 축제만 있는 것은 무순시가 상당히 조선족들을 위해 배려하고 지원해주고 있는 사실이다”면서 “무순에는 조선족 인구가 많고, 이들 조선족들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단합이 잘 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룡 선생은 또 "해마다 열리는 조선족 민속축제는 무순의 조선족 동포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성대한 명절로 이 행사의 목적은 바로 한중문화교류 활동을 발전시키고, 이로 인해 무순 조선족 동포들의 문화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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