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자 보호법' 내달말 시행…직원 지키기 의무화
욕설·성희롱 비일비재에도 은행 책임자는 '평가에 급급'
전문가 "회사의 적극적 대응과 사회적 인식 변화 필요"

[일간투데이 천동환 기자] 수 많은 고객들을 직접 또는 전화로 상대해야 하는 은행원들은 대표적 감정노동자다. 실적압박만으로도 녹초가 되기 일쑤지만, 무엇보다 그들에게 강한 상처를 남기는 것은 일부 악질고객들의 비인간적 대우다. 게다가 폭언에 성희롱까지 당해도 하소연할 곳 조차 마땅치 않은게 현실이다. 이들을 지키기 위한 법이 마련됐지만, 무엇보다 사회 전반의 인식 개선 노력이 필요하단 목소리가 높다.

'고객응대직원에 대한 보호 조치 의무(이하 감정노동자 보호법)'를 신설한 은행법의 시행령 개정안 입법예고가 지난 4일 끝났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입법예고기간 동안 접수된 의견을 바탕으로 시행령안의 추가 개정작업을 거쳐 다음달말부터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시행될 예정이다.

이후엔, 은행이 고객의 폭언이나 성희롱, 폭행 등으로부터 직원을 의무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특히, 직원이 요청하는 경우엔 해당 고객으로부터 분리하거나 업무담당자를 교체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또, 피해 직원에 대한 치료 및 상담을 지원해야 하며, 상시적 고충처리 기구도 마련해야 한다.

이와 함께, 은행은 현재 시행령안이 그대로 유지될 경우, 고객의 행위가 범죄에 해당되고 피해 직원의 요청이 있을시 형사고발을 해야 한다. 꼭 이 경우가 아니더라도 직원이 고객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현재 피해정도 및 장래 피해발생 가능성 등을 감안해 관할수사기관에 신고해야 한다. 은행은 이 때 필요한 모든 법적 절차를 지원해야 한다.

◇ 악질고객 스트레스에 떠나고 싶은 '은행'

감정노동자 보호법은 지난해 7월 김기식 더불어민주당의원의 대표발의로 금융 관련 5개 업권 법률(은행법·보험업법·상호저축은행법·여신전문금융업법·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과 근로기준법 내 신설이 추진됐다.

당시 김 의원은 "감정노동자 문제는 사용자의 근로자 보호 의무와 관련된 문제이고, 다른 한편으론 인권 차원의 문제다"며 "대다수 감정노동자가 여성이란 점에서 성희롱과 폭언 등의 문제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다"고 법 도입의 취지를 밝힌 바 있다.

금융경제연구소가 지난 2014년 11월 은행 콜센터 및 영업창구, 민원전담 근무자 377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은행권 감정노동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2.6%가 이직을 생각한 적이 있으며, 가장 큰 이유로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76.3%)'를 꼽았다.

또, 응답자의 75.6%가 악성민원의 응대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답했으며, 악성민원의 유형으론 '말 꼬리 잡기나 인격무시'를 경험자한 사례가 전체의 89.8%로 가장 많았다.

실제, A은행 영업점 3년차 창구 직원 이모 씨는 "고객들로부터 욕설에 성희롱, 하인 취급을 받는 경우는 정말 흔히 있는 일이다"며 "어떤 고객은 신분증과 같은 기본 필요서류도 없이 업무 처리를 요구하며 떼를 쓰기도 한다"고 하소연 했다.

은행 업무를 '총체적 비위 맞추기'라고 표현하는 은행원도 있었다.

B은행 영업점에서 근무하다 휴직 중인 박모 씨는 "정말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인격을 무시하는 손님들이 많다"며 "은행 상사들까지 괴롭히는 경우엔 안팎으로 비위 맞추기에 정신없다"고 토로했다.

▲ 은행 직원 악성민원 경험 유무 및 횟수(복수응답, 단위:%).자료=금융경제연구소(정혜자)

◇ 은행들 상담채널 있지만 악성민원 대응엔 '소극적'

대다수 은행들은 이런 문제에 대응키 위해 직원들을 위한 자체 상담채널을 운영 중이라고 밝혔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 "직원들의 고객상담 등 감정노동에 따른 직무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스마트고객상담부를 두고 있다"며 "심리상담 전문인력을 배치해 전국 영업점 직원들에 대한 연계상담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고 말했다.

또, 우리은행 관계자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익명 상담 또는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며 "시행령이 개정작업을 거쳐 확정되면 그에 맞는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직원들이 막상 악성민원과 부딪쳤을 땐 회사차원의 적극적 대응이 이뤄지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언급한 금융경제연구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악성민원 발생시 회사가 취하는 대응으로 근무자의 39.7%가 '상급자나 보안요원에게 고객응대를 대신할 수 있다'고 답했다. 반면, '고객에게 무조건 사과나 금전적 보상을 한다'와 '인격적 모욕을 당해도 전화를 끊지 말아야 한다'는 응답 역시 각각 38.1%와 36.3%로 높게 나타났다.

특히, 악성민원 발생 시 회사로부터 받은 대우에 관한 질문에선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업무에 집중해야 한다'에 응답한 비율이 52.2%로 가장 높았으며, '말로 위로해 준다'가 45.8%로 뒤를 이었다.

A은행 영업점 직원 이 씨는 "회사에서 상담 채널을 운영 중인지,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통과됐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며 "민원이 발생하면 해당 직원과 소속지점의 평가점수가 깎이는 것이 우선이고, 금감원으로 민원이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엔 정말 크게 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입사할 때 월급에 욕 먹는 값도 포함돼 있단 말까지 들었다"고 털어놨다.

 

◇ 법 도입 긍정적이나 '공감대 형성' 우선돼야

한편, 전문가들은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대고객 업무 종사자들의 인권보호를 위한 큰 걸음이 될 수 있단 평가를 내놨다.

이정훈 서울노동권익센터 연구위원은 "지금까진 직원이 고객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때 상담 및 법적 절차를 혼자 해결해야 하는 구조였다"며 "특히, 아웃소싱이 대부분인 콜센터의 경우 회사로부터 보호받기가 더 힘들었지만 법이 시행되면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또, 윤진호 금감원 특별민원대응팀장은 "법이 통과되기 전부터 감정노동과 관련해 여러가지 대응 방안을 고민해 왔지만, 여전히 주도권은 회사에 있다"며 "직원의 요청에 따라 회사가 법적 절차까지 지원해야 하는 것은 혁신적이다"고 강조했다.

반면, 해당 법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해, 감정노동자 인권보호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선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우선돼야 한단 지적도 나온다.

서울노동권익센터 이 연구위원은 "지금까진 회사에서 악질 고객에 대한 조치를 취하고 싶어도 대놓고 하긴 어려웠다"며 "이제 제도적 장치는 마련됐으니, 회사들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가느냐가 앞으로의 과제다"고 조언했다.

또, 정명희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금융정책실장은 "현재 마련된 법과 시행령안은 상당히 만족스러운 수준이지만, 시행전 개정의 여지는 남아있다"며 "산별교섭을 통해 관련 시스템 및 교육프로그램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업계 전반에서 감정노동자 보호가 필요하단 것엔 큰 이견이 없다. 하지만 일각에선 관련 법 시행 후 소송 남발의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고객들이 직원들을 인격적으로 대할 수 있는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가 바탕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