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흑룡강성 탕원현 탕왕향 금성촌 권태용(84) 옹의 인생 회고
금화지구와 오성산 상감령 전투 등에 참전…전쟁 참상 증언
"지금 심정으론 안동 고향집에서 다시 살다 죽고 싶다" 밝혀

[일간투데이 류재복 기자] 6·25 한국전쟁이 66주년을 맞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남침으로부터 발발한 전쟁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말미암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중이지만, 휴전 이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국지적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남북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고 지금까지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한국전쟁 초기, 김일성이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공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귀환한 3만5000명 규모의 조선족 병사들의 공이 컸다. 모택동은 1949년 중국 동북3성 거주 조선족으로 구성된 2개 사단(2만명)을 통째로 북한에 넘겼다.

이들은 인민군 5·6사단으로 편성됐다. 1950년에는 나머지 부대원 1만5000명을 또 귀환시켰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 실전을 쌓은 백전노장들, 인민군의 3분의1에 해당하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지난 3월 23일 오전 기자는 중국 흑룡강성 탕원현 탕왕향 인민정부의 정성일 향장의 소개로 향 정부 인근, 금성촌에 살고 있는 조선족 노인 권태용(84)씨를 만났다.

권씨는 6·25 한국전쟁에 참가를 했던 살아있는 중국인민지원군 노전사(老戰士)였다. 권씨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일제시대에 부모를 따라 중국에 온 후 할 수 없이 중국 국적을 가져야 했고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으로서 모진 풍파를 겪으며 살아야 했다.

■중국에는 언제 왔고 한국전쟁 참전 동기는.

내가 태어난 곳은 한국의 경상북도 안동이고 1933년생으로 안동 권씨다.

9살 때 부모를 따라 이곳 중국 흑룡강성 탕원현에 이주를 왔고 그 후 부모님과 농사에 전념하다가 17살 때인 1950년 10월, 영문도 모른 채 중국인민해방군에서 조선인민군을 돕는 한국전쟁에 참가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을 모집한다면서 심양으로 집결을 시켰다.

그 후 심양에서 2개월간 훈련을 받은 후 1951년 1월에 단동을 통해 한국에 도착했다.

■첫 전투를 했던 시기, 그리고 가장 생생한 전투는.

1951년 1월 압록강을 넘어 먼저 북으로 갔다. 당시 나를 포함해 한국에 도착한 중국인민지원군은 300명인데 이들은 모두가 조선족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한국의 각 지원군 전투부대에 배속이 되어 통역을 하는 통역병 이었다. 우리는 북한에 들어가자마자 조선인민군, 그리고 지원군들과 함께 모두 지령을 받고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유엔군은 우리가 한반도에 들어가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 후 미군은 우리에게 기습을 받았고 서부전선에서도 지원군은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지원군의 공격으로 유엔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유엔군이 느낀 지원군들은 조선인민군과 매우 달랐다.

11월 하순, 동부전선에서 우리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이 시작됐고, 유엔군의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특히 미 제1해병사단이 가장 위기에 빠졌다.

우리 지원군의 공격뿐만 아니라 살인적인 추위로도 공격을 받은 셈이다. 우리 지원군은 미 해병대를 제거하기 위해 7개 사단을 동원해 그들을 겹겹이 에워싸기도 했다.

이게 바로 지원군의 주 공격방법인 중공군 인해전술이었다. 그 후 내가 도착한 곳은 강원도 춘천이었고 내가 소속된 부대는 38군 1사 포병대대였다.

나는 그때 사단관측소, 지휘소에서 통역병 임무를 수행했는데 인근에 큰 저수지도 보였다. 당시 나의 계급은 전사였고 금화지구와 오성산 상감령 전투에 참전했다.

■당시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는.

나는 금화지구와 오성산 상감령 전투에 참여를 했다. 상감령 전투와 금화전투에서 통역병을 하면서 유엔군 및 한국군들과 접전을 벌리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한국군들은 우리 지원군들을 보면 싸우지도 않고 놀라서 그냥 도망을 갔다. 특히 상감령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지원군부대 38군은 원래 조선50군단에 속한 부대로 조선인민군들이 많았다.

이 부대에서 서쪽을 담당한 서해바다 인근에서는 인민군이 1/3, 지원군이 2/3으로 편성돼 전투를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적군 즉, 유엔군 1개단병력 1000여명을 몰살시키면서 승전을 했다. 그때 지원군으로 한국에 온 중국인민해방군 38군부대는 일본군 731부대를 능가하는 살인부대로 명성이 높아 모택동 주석이 ‘만세군’이란 칭호를 준 부대였다.

그러나 아군 즉, 조선인민군과 지원군들도 많이 죽었다. 나는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생생히 보았고 지금도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들이 쓰러져 죽어가면서 고함을 지르는 모습, 그리고 다리와 손발이 파편에 맞아 잘려 나가고 심지어는 목도 잘려나가는 시체들을 보았다.

그들이 흘린 피는 이루 말 할 수가 없으며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이때 권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천운이 있어 그 전쟁에서 죽지를 않고 살아 돌아 온 것을 기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금화전투에 대한 기억은.

강원도에서 싸웠던 금화전투는 6·25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는 조선인민군, 한국군, 지원군 등 실로 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그때 전투에서 한국군 부대는 우리 지원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계속 후퇴를 했다. 내가 생각하건데 1952년 7월부터 10월 중순까지 수차례 이 지역의 주인이 바뀌었던 금화지구 수도고지 전투도 잊을 수가 없다. 하여간 치열하게 싸웠던 곳으로 지금도 나는 당시의 현장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상감령 전투도 참전 했다고 하는데 당시 상황은.

지금도 중국인들은 상감령 전투를 아주 좋게 상세히 기억한다. 그것은 1952년 10월경에 있었다. 유엔군의 강한 공격에 맞서 상감령 전투에서 고전을 했던 조선인민군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고 자부한다. 즉 상감령 전투는 중국이 조선인민군, 즉 북한을 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전투였다.

상감령 전투는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43일간의 전투로 중국이 승리한 전투였다. 당시 지원군 총사령관 팽덕회는 지원군부대 15군사령관 진기위에게 “오성산을 잃어버리면 조선의 역사에 책임져야 한다”고 엄명했다. 때문에 43일간의 분투 끝에 진기위는 오성산 아래 상감령 에서 유엔군의 북진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 전투였다.

■특별한 전투나 잊을 수 없는 상황은.

중국인민지원군은 임진강에서 강원도까지 수백㎞ 전선을 사이에 두고 유엔군과 대치했다.

유엔군은 우세한 화력과 포병 탱크 전폭기 등으로 지원군 진지에 수만 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다. 별로 장비가 없는 지원군 입장에서는 전선을 지키는 것이 최고였다.

그때 지원군 제47군단 제140사단은 유엔군의 맹포격을 방어하기 위해 동굴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이 동굴로 1개 중대 혹은 1개 대대도 유엔군의 포탄공격과 미군기 10대의 폭격도 견딜 수 있었다.

이 동굴의 효과가 좋게 알려지자 1951년 10월 모든 주요진지를 갱도식으로 하고 깊이는 5m 이상으로 하라고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1952년 말까지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250㎞의 모든 전선에 땅굴을 거점으로 한 진지방어의 지하갱도가 구축됐는데 그게 바로 모택동이 이름을 지어 준 ‘난공불락의 지하만리장성’이다. 모택동은 “어떤 부대도 3개월 식량을 보관할 수 있었고 강당도 있어 생활이 좋았다”고 만족해했다.

■언제 귀국했고 중국에 돌아온 후 무엇을 했나.

1953년 7월에 인천항을 떠나 단동으로 귀국을 했다. 당시 배에는 전쟁에서 다친 심한 부상병들이 많았는데 단동으로 돌아오면서 이들의 상처가 심해 목숨이 끊어진 병사도 있었다.

생명에 위험을 느끼는 병사들이 늘어나자 배 안에서는 상부의 지령을 받고 이들 사망자와 아직은 목숨이 살아있는 부상병들을 그대로 바다에 던져 목숨을 버리게 했다.

정말 그 당시의 모습을 보면 중국 군부는 너무도 잔혹한 처사들을 저질렀고 그렇게 전우들이 죽어간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귀국 후 3년간 인민해방군에서 부대막사 105채를 짓는 공병대에서 복무하다가 1956년에 제대했다. 1958년도에 결혼을 해 3남 1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현재는 모두 한국에서 살고 있다. 나도 현재 한국국적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중국 단동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자료가 있는지.

‘6·25 전쟁’ 혹은 ‘한국전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김일성의 불법남침 6·25전쟁’을 중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고 부른다.

당시 중국이 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도왔다’는 의미이다. 중국은 이 원조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단동에 항미원조(抗美援朝)기념관까지 건립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갖고 있는데 당시 참전했던 전사들을 초청하고 있기에 여러 번 참석을 했다.

‘항미정신 영원히 빛내자’라는 현수막이 게시돼있는 기념관 광장 한쪽에는 항미원조 기념탑이 정남향으로 우뚝 서서 신의주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기념탑의 높이가 53m인데, 이는 항미원조 전쟁이 끝난 1953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기념탑은 내부에 당시 전사한 중공군들의 명부가 보관하고 있어 위령시설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이 명부에는 한국전쟁 시 중공군 67만3000명(비전투인원 포함)이 사망하거나 부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념관에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로 명의로 1950년 10월 1일 모택동에게 보낸 편지도 전시돼 있다. 김일성은 이 편지에서 그해 9월 한·미 해병대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곤궁에 빠진 북한군의 다급한 처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현재의 중국 인민해방군이란.

중국 인민해방군은 중국 대륙 내 7개 지역에 분산해서 주둔하고 있다.

이 가운데 요령(遼寧)-길림(吉林)-흑룡강(黑龍江)성 등 동북 3개성 일원을 장악하고 있는 심양군구의 제39집단군은 항일전쟁 시기에는 주덕(朱德), 국민당과의 전쟁 시기에는 임표(林彪)가 이끌다가, 한국전쟁 때는 1950년 10월 양득지(楊得志)의 지휘로 압록강을 넘어 선봉 부대로 북한 지역에 투입된 후 원산에서 미군과 첫 전투를 벌인 바로 그 부대다.

산동성 제남군구의 제26집단군 역시 1950년 11월 한국전쟁에 투입돼 철원·금화 지역에서 한국군과 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한 경험을 가진 군대로 알고 있다.

■중국인민지원군으로서의 혜택이 있는지.

현재 매월 1000원(元)의 비용을 국가로부터 받고 있으며 무료로 병원을 다니고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국가에서 준 것으로 현재의 생활에 나는 아무런 불편이 없다.

■고향인 한국에는 언제 가 보았나.

1953년 전쟁이 종료, 중국으로 돌아온 후 43년만인 1996년도에 고향 안동에 다녀왔다. 안동에는 아직도 내가 살던 집이 그대로 있어서 너무도 반가웠고 좋았다. 지금 심정으로는 고향집에서 다시 살다가 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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