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흑룡강성 탕원현 탕왕향 동승촌 바이펑즈 할머니의 인생 회고
남편 생존 시 상감령 전투 회고…전사 부하병사들 길바닥에 놓고 온 것 가슴 아파해
항상 "머리 아프다"고 토로…3년 전 사망 후 화장하니 &

[일간투데이 류재복 기자] 6월은 전쟁을 생각하게 하는 달이다. 1950년에 발발한 6·25 한국전쟁, 어언 66년이 됐다. 6·25 전쟁으로 인해 남한에서는 민간인 37만여명 사망, 39만여명이 납치·실종됐다.

북한에서도 역시 민간인 120만여명이 사망했고 전투를 벌인 군 병사들은 한국군 13만7000여명, 유엔군 4만여명이 전사했다. 한국군·유엔군 4만여명이 포로 및 실종이 된 비참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그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북한의 호전성은 66년 동안 변함이 없다. 그들이 국지 도발을 감행한 사례는 무려 200여건에 달한다.

6·25전쟁 발발 초, 김일성이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공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귀환한 3만5000명 규모의 조선인 장병의 공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모택동은 1949년 중국 동북3성 거주 조선족으로 구성된 2개 사단(2만명)을 통째로 북한에 넘겼다. 이들은 인민군 제5, 제6사단으로 편성됐다. 1950년에는 나머지 부대원 1만5000명을 또 귀환시켰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 실전을 쌓은 백전노장들, 인민군의 1/3에 해당하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당시 한국전쟁에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던 중국인민해방군 소속의 우잉바오(于永寶)씨는 중국 한족(漢族·1926년생)으로 3년 전인 2013년에 사망했다. 기자는 지난 3월 22일 중국 흑룡강성 탕원현 탕왕향 동승촌(湯原縣 湯旺鄕 東升村)에 살고 있는 우잉바오씨의 부인 바이펑즈(白風芝·88)씨를 만나보았다.

그녀는 현재 딸·사위와 함께 셋이 이곳 농촌에서 살고 는데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은 남편인 우씨가 6·25 한국전에 참전했던 공로 우대증명을 받은 1973년 이후부터 매달 받은 돈을 모아서 산 집이었다. 우씨가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귀국해서는 이 집이 아닌 바로 이웃(현재는 폐가로 방치)에 집이 있음을 기자는 보았다.

한국전에 참가했던 중국인민해방군 중 살아있는 사람들이나 또는 참가했던 참전군인의 가족을 취재하러 한국에서 기자가 찾아 온 사실을 알리면서 바이펑즈씨를 만나자 그녀는 매우 반가워하면서 6·25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남편인 고(故) 우잉바오씨에 대해 아는 대로 들려주었다.

■남편인 우잉바오씨는 어떤 분인지.

내 남편 우잉바오가 한국전쟁 참전 당시의 소속은 중국인민해방군 3군단 112사 235단 6연대 연대장이었다. 그때 나는 그와 결혼을 한지 불과 3개월 밖에 안 됐다.

참전통보를 받은 후 남편은 아내인 나에게 "나는 남조선의 전쟁에 항미원조(抗美援朝)를 위해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전쟁에 싸우러 가는데 그동안 잘 지내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후 남편은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지만 항상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남편이 왜 머리가 아프다고 말 하는지를 살아서는 모르고 있다가 그가 3년 전 사망한 후 화장을 하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즉 머리에서 파편이 나왔다. 그러니까 싸우다가 파편조각이 머리에 박힌 것을 남편은 평생 동안 머릿속에 두고 있다가 죽어서야 밝혀낸 것이다.

■남편이 전쟁시 겪었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

남편은 중국에서 인민해방군 연대장 간부로 있다가 참전을 했기에 남조선에 가서도 병사들을 지휘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도 머리에 파편이 박힌 것을 보면 병사들과 싸운 것이 맞다. 남편은 1952년 10월 20일에 있었던 남조선의 상감령 전투에서 싸운 이야기를 해 주었고 당시 유엔군 진지에 부하 병사들이 육탄으로 돌격해 유엔군의 총구를 막으면서 싸우다가 자기가 데리고 간 부하병사들이 죽어서 그 시신들을 처리하기 위해 무더기로 구덩이를 파서 묻고 또 쓰레기처럼 길바닥에 버리고 갈 때 매우 가슴이 아팠다고 말 했다.

■남편은 전쟁 후 돌아와서 어떻게 생활을 했는지.

남조선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을 떠날 때 남편은 중국 부대에서 연대장이었다. 때문에 그는 전쟁을 마치고 귀국을 하자 원래 복무를 했던 부대인 중국인민해방군 에서 다시 복무를 하라고 했지만 남편은 전쟁에 매우 지친 탓인지 시골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곳 동승촌은 중국의 시골이고 또 농촌이기 때문에 할 일은 농사짓는 일 뿐이다. 먼저 남편은 집을 짓는다고 스스로 벽돌을 찍어서 집을 지었다.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집 뒤쪽에 남편이 직접 지은 집이 있다. 그 집에서 살다가 1973년 7월에 이곳 마을의 촌(村)지부 서기인 류신핑이 한국전쟁에 참가했던 중국인민해방군 군인에게 집 한 채씩을 중국 정부에서 준다고 해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을 받게 돼 살다가 남편은 3년 전에 세상을 뜨고 현재 딸, 사위를 데리고 같이 살고 있다.

■중국 정부에서 남편에게 준 혜택은 무엇이 있었는지.

남편이 한국전쟁에서 돌아오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에서 훈장을 수여했고 또 항미원조 지원위문단에서 훈장을 주었다. 그리고 1985년도부터 매달 400위안씩을 주었다. .

그러나 남편은 정상의 생활을 못했다. 이미 말했듯이 항상 머리가 아프다고 했고 오른쪽 발뒤꿈치도 파편에 맞아 큰 상처를 당해 어려움이 많았지만 당시 중국정부는 치료를 해 주지 않았다.

우리가 돈이 있었다면 직접 병원을 갔겠지만 그럴 형편이 못됐다. 그리고 탕원현 민정부에 찾아가 이런 병세가 있음을 하소연 했지만 그들은 돈이 없다면서 우리의 청을 거절했다.

우잉바오 부인 바이펑즈씨는 기자와 인터뷰를 마치자 남편이 자신에게 남겨주고 떠난 물건들을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을 마치고 돌아와 중국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과 공로메달, 그리고 인민해방군 복무 증명서를 보여주었다. 수십 년을 잘 간직해 온, 그들 부부에게는 매우 소중하고 귀중하고 값진 보물이었으리라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