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부처간 의견 충돌·권익위 업무 마비로 전업권 혼란↑
"시범타 될 수 없어…일정 취소하고 상황 지켜볼 수 밖에"

▲ 현대엔지니어링 경영지원본부 법무실은 지난 11일 본관 지하 2층 대강당에서 한 대형 로펌의 변호사를 초빙해 '김영란법 관련 외부전문가 초빙교육'을 실시했다. 사진=천동환 기자

[일간투데이 강태현 기자]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대한 정부의 논의가 시간을 끌면서, 이에 대비하고 있는 기업들의 속이 타들어가고 있다.

현재 김영란법의 시행일까지 다음달 28일로 확정된 가운데, 정부 부처간 의견 충돌로 시행령이 확정되지 않아 업체들의 혼란을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 '가액기준'에 팽팽한 이견

정부는 지난 2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이석준 국무조정실장과 주무부처인 국민권익위원회, 교육부, 법무부, 행정자치부 등 15개 관계부처 차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김영란법의 시행령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의 쟁점은 역시 김영란법의 가액기준이었다. 현재 김영란법 시행령안이 허용하고 있는 가액기준은 음식물 3만원, 선물 5만원, 경조사비 10만원이다.

하지만, 농림수산식품부와 해양수산부, 중소기업청 등 3개 기관은 관련 업계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액기준을 상향해야 한다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에 반해 권익위는 현행 가액기준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적용 대상 또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부가 어느 수준으로 김영란법의 적용 대상을 정할지 결론을 내지 못하면서, 기업들이 로펌을 통한 유권해석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현재 김영란법 시행령은 사립학교 교원과 언론인도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지만 세부적인 기준은 나오지 않고 있다.

당시 이석준 실장 역시 "법 적용 대상자들이 명확하게 법 내용을 이해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적용대상자가 아닌 일반 국민들과 기업들이 불필요하게 위축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정부는 29일 오후 서울청사에서 김영란법 시행령을 논의하기 위한 관계부처 차관회의를 다시 개최했다.

이번 회의에서 정부는 김영란법 시행령의 가액기준을 최종 확정했지만, 법 적용 대상 기관과 적용 범위에 대해서는 일부 부처의 반대로 공식 발표를 잠정 보류했다.

정부는 회의를 통해 결정된 시행령을 다음달 6일 국무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의결할 것으로 보인다.

 


◇ 유권해석에 의지하는 기업들

이같은 상황에서 기업들은 주무부처인 권익위가 내놓은 김영란법 관련 자료를 유권해석하는 것을 최선의 대비 방법으로 삼고 있다.


시행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시행령이 확정되지 않은 것도 문제이지만, 김영란법에 대한 기업의 질의응답을 진행해야 할 권익위가 사실상 업무마비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29일 권익위 관계자는 "업권별로 가정하고 있는 상황이 각각 다르다 보니, 질문이 너무 많아서 취합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더욱이 현재 법제처에서 시행령을 심사 중인 만큼 구체적인 답변이 어려운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대기업은 물론 모든 업계의 기업들은 로펌 등의 도움을 받아 자체적인 '김영란법 배우기'에 돌입했다.

현대엔지니어링의 경우 지난 11일 본관 지하 2층 대강당에서 경영지원본부 법무실 주관으로 한 대형 로펌의 변호사를 초빙해 '김영란법 관련 외부전문가 초빙교육'을 실시했다.

롯데그룹은 지난 17일 30여개 계열사 홍보 실무자들을 대상으로 김영란법 관련 강연회를 열었고, 같은날 CJ그룹 또한 본사에서 10여명의 주요 계열사 홍보팀장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었다.

한 유통업계 홍보팀의 부장은 "김영란법 시행일이 결정된 이후, 계획했던 일정들이 취소되는 상황"이라며 "아무래도 스킨십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시행일 이전까지 대부분의 미팅을 당겨서 소화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위법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판단해도, 해석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소위 '시범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시행 이후의 모든 일정을 조심하고 있다"고 밝혔다.

금융사들도 법 시행을 앞두고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

업계는 사내 인트라넷에 질의응답 시스템을 마련하고, 로펌을 통해 직원 교육을 실시하는 등 법 시행 대비에 신중을 기하면서도, 한동안은 최대한 외부 접촉을 피하고 몸을 사리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상황에 따른 세부규정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작은 실수로도 본보기식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법 시행 이후의 일정이 모두 조심스러운 상황"이라며 "계속 이렇진 않겠지만, 일단 앞으로의 상황을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권익위와 전문가들은 '현재로썬 어쩔 방법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가천대학교 법대 서완석 학장은 "시행령이 법 시행 이전 혹은 동시에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며 "시행 이후에는 문제가 생길 경우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하지만, 이전에는 예방적 차원에서 권익위가 내놓은 자료를 유권해석 해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권익위 관계자는 "법 시행 이후에도 권익위가 계속 질의응답을 진행하겠지만, 문제가 발생했을 때 판단은 법원에서 하는 것"이라며 "앞으로 판례가 축적되면서 기업들이 겪고 있는 궁금증들이 차차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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