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경기장 건립 후보지는 1968년 4월 지정됐다. 중앙도시계획위원회는 다른 도시계획안건과 연관해 올림픽 경기장 부지도 마련해 둘 것을 서울시에 제의했다. 이에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이 제시한 변두리 지역인 성동구 둔촌동.가락동.오금동 일대 약 1백만평이 올림픽 경기장 부지로 지정됐다.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때였으므로 시 관계자들도 '어차피 별로 쓸모가 없는 땅이니 올림픽 경기장 예정지로나 지정해두자'고 생각했다.
73년 도시계획국장이었던 나는 잠실지구 구획정리사업을 추진하면서 올림픽 경기장 예정지 중간에 있는 아담한 언덕에 올라가곤 했다. 그러나 이 언덕이 백제 유적인 몽촌토성이라는 사실을 아는 시청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잠실지구 매립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73년께 이 언덕을 허물어 생긴 흙으로 잠실을 메우자는 의견까지 나왔었다. 그때 어느 과장만이 "보통 언덕은 아닌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고 허물었다가 역사적 가치가 있는 토성이면 어떻게 하느냐"며 반대했다. 이에 따라 잠실지구는 연탄쓰레기로 메워졌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었다.
83년 4월 서울올림픽에 대비한 '국립경기장 단지계획' 현상 공모가 실시됐다. 넓은 계획도로로 둘러싸인 국립경기장 안에 들어갈 각종 경기장과 각급 체육학교의 배치, 몽촌토성을 포함한 공원.녹지 조성, 교통계획 등을 공모했다. 그러나 13개 응모작 중 눈에 띄는 작품이 없어 가작 3점만 선정하고, 설계는 서울대 환경대학원 부설 환경계획연구소에 맡겼다. 설계 총괄책임자는 나중에 서울시 부시장을 지낸 강홍빈씨였다. 康씨는 우선 몽촌토성 발굴 담당자를 만나 조언을 들었다. 이 자리에서 발굴단에 참여했던 서울대 최몽룡 교수가 "몽촌토성은 해자(垓字)로 구획돼 있다"고 알려줬다. 崔교수의 설명은 경기장 설계에서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성내천과 해자를 이용해 토성과 경기장 시설지역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또 성내천과 해자를 연결하고 인공호수까지 조성하면 뛰어난 경관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를 토대로 마스터플랜을 확정한 다음 실시설계에 들어갔다. 체조.수영장.자전거경기장은 공간연구소에서, 역도경기장은 서울건축에서, 펜싱경기장은 강건희.김기철씨가 맡았다. 우보기술단.삼정건축이 조경을, 환경그룹.천일기술단이 토목을 담당했다.
사업비 1천억원을 들여 약 2년반 동안의 공사 끝에 86년 6월 올림픽타운의 우아한 모습이 드러났다. 이 시설은 그 모습 그대로 올림픽공원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먼 훗날까지 지금의 모습을 간직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