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합시다중앙회 회장·본지 논설고문

법무부 장관을 지낸 후 고교 선배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를 돕던 김기춘씨. 1992년 말 대선 직전 ‘초원복국집 사건’으로 위기를 맞았다. 그때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유행했다. 검찰은 김씨를 대통령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그러나 김씨는 관련 법 조항이 ‘표현의 자유와 참정권’을 제한하고 있다며 위헌 심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위헌 제청을 받아들여 검찰 공소가 취소됐다. 나라를 들썩거리게 한 파문을 일으켰지만 법적 처벌은 받지 않았다.

■ '정수장학회 장학생' 김기춘 전실장

박지원 의원은 최순실 사건에 얽혀 있는 그에 대해 “법률 미꾸라지이자 형량을 주석에서 계산할 수 있는 형량 계산기”라고 비꼬았다. 초원복국집 사건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4·19가 나던 해에 21세 나이로 고등고시에 합격한 ‘김 검사’는 명석한 두뇌로 윗분들 신임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똘똘이’로 불렀다는 증언도 있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보좌관으로 일할 때는 육영수 여사 저격범 문세광의 입을 열게 했다. 드골 프랑스 대통령 암살 시도를 다룬 소설 ‘자칼의 날’을 읽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꺼내 자백을 이끌어냈다. 김씨는 서울대 법대 시절 ‘박정희 육영수’ 이름을 딴 정수장학회 장학금을 받았다. 박정희 정부에서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유신헌법 초안을 마련했다.

2013년 8월엔 73세 나이로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맡았다. 그때 첫 기자 브리핑에서 “윗분 뜻을 받들어 발표 드리겠다”고 서두를 꺼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30년은 시계를 거꾸로 돌린 것 같은 이 말이 실은 박근혜 청와대의 정확한 분위기였다. 김 전 실장은 ‘기춘 대원군’으로 불렸다. 민정수석을 지낸 고 김영한씨 비망록에서도 청와대 수석들을 틀어쥐었던 그의 존재감이 드러난다. 그래서 최순실 존재를 몰랐다고 하는 그의 주장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얘기들이 나온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대통령의 7시간 논란은 “대통령 위치를 정확하게 몰랐다”는 그의 국회 답변이 만든 것이다. 김 전 실장은 차은택이 최순실 지시로 자신을 만났다는 증언이 나오자 다시 한 번 쓰리 노(3 NO)로 부인했다. “최씨를 알지 못하고, 만난 적 없고, 전화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인지 봐달라는 박 대통령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 같은 모양새다.

■ ‘최순실 국정농단’방치 꼭 밝혀내야

최순실 국정 농락에 가담한 차은택 변호인이 “차씨가 최씨 소개로 2014년 6~7월쯤 청와대 비서실장 공관에서 김기춘 실장과 김종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정성근 문체부장관 내정자를 만났다”고 밝혔다. 최씨가 차씨에게 공관 주소를 알려주면서 가보라고 해서 갔더니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차씨는 한 달쯤 뒤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됐다. 그간 “최씨를 모른다”고 했던 김 전 실장 주장이 거짓말일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또 차씨 변호인은 차씨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장모인 김장자 삼남개발 대표가 최순실과 함께 김 대표 소유 골프장에서 골프를 했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서도 “맞는 얘기”라고 했다. 그간 최씨와 주변 인물들이 어떻게 아무 견제를 받지 않고 전횡을 일삼을 수 있었는지가 큰 의문이었다. 그런데 차씨가 최순실 소개로 김 전 실장을 만났고 우 전 수석 장모와 최씨가 골프를 하는 사이였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김 전 실장은 박근혜 정권 탄생에 기여한 원로 7인회의 멤버이면서 2013년 8월부터 2015년 2월까지 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서 보좌했다. 김 전 실장이 청와대를 떠나면서 자신의 대리인 격으로 놔둔 사람이 우 전 수석이다. 최씨의 국정 농단은 1차적으로 민정수석의 관할이고 2차적으로 민정수석의 상관인 비서실장의 관할이다. 검찰은 이미 두 사람에게 증거를 인멸할 너무 많은 시간을 줬다. 지금이라도 수사를 서둘러 두 사람이 최씨의 국정 농단을 어떻게 방치했는지 밝혀야 한다. <나경택 칭찬합시다운동중앙회 회장·본지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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