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노예해방을 놓고 4년간 이어진 미국의 남북전쟁은 여러 면에서 특별했다. 우선 유례없는 희생자가 났다. 전체 인구 3100만 명의 3%인 103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독립 이후 240년 동안 미국이 치른 다른 모든 전쟁의 사상자를 합친 수준이다. 기관총이 나왔는데도 뻣뻣이 선 채 줄지어 돌격하는 나폴레옹식 전법(戰法)을 고수한 탓이다.

이토록 처절한 살육전임에도 가혹한 보복과 무거운 배상금 부과가 없었다는 점도 특이하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이끌던 북부는 항복해온 남군(南軍) 모두를 아무런 조건 없이 귀가시켰고, 남군 장교에겐 권총 소지마저 허용했다.

심지어 총사령관이던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은 북군(北軍) 병사들이 승리에 도취돼 함성을 지르자 이를 말리며 이렇게 말한다. “전쟁은 끝났다. 이제 반군도 다시 우리 국민이 된 것이다.” 남군 측 슬픔을 배려한 조치였다.

이 모두 국민적 통합을 위해서였다. 이러한 전통 덕분인지 요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통합을 입에 달고 산다. 11월23일 추수감사절 때에도 “분열을 치유하고 하나의 나라로 나아가길 기도한다”는 통합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더욱 이목을 끈 것은 전날인 22일 이뤄진 뉴욕타임스(NYT) 본사 전격 방문이었다. NYT는 선거 내내 트럼프 공격에 앞장섰던 매체이다. 누가 보든 국민적 통합 차원에서 적대적인 언론에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노무현·이명박 전(前)대통령도 당선자 시절에 언론사 행사에 간 적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방문은 완전 딴판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한겨레신문을 찾았고, 이명박 당선자는 조선일보 행사에 참석했다. 모두 자신의 성향에 맞는 언론사를 방문한 것이다. 그나마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달랐다. 그는 당선되자 조선·동아일보 관련 행사부터 챙겼다. ‘정치 9단’이란 명성에 걸맞게 통합의 중요성을 절감했던 모양이다.

■ 가장 좋아한다는 책이 자기 자서전

최순실 사태로 흉흉한 요즘, 정치권에서는 통합은커녕 편 가르기와 상대방 공격을 위한 막말만 쏟아낸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찍은 이들이라고 분노하지 않는 게 아니다. 이들의 대부분도 배신감에 치를 떤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의 하야 또는 탄핵을 바란다는 응답이 90%를 넘은 것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이런 판국에 여당 전체를 ‘부역자’ 집단으로 매도하고 다른 당 대표에 대해 “똥볼을 찼다”고 비난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요즘 우리를 힘들게 하는 두 가지 있다고 한다. 하나는 트럼프 당선자 향후 행보 맞히기이고 또 하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신세계 읽기이다.
후자는 정말 힘든 것 같아 전자에 도전해 보면 어떨까. 독서를 즐기지 않는 트럼프 당선자가 선거전 당시 “내가 좋아하는 책이 두 권 있다”고 해서 솔깃하다. ‘협상의 기술’ ‘정상에서 살아남기’이다. 결국 좋아하는 책이 자기 자서전이라니 트럼프스럽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의 철학과 스타일이 정확히 담겨 있다는 뜻일 게다.


두 권의 책 속에 드러난 트럼프 스타일의 핵심은 ‘상대 교란→위장 및 기세 선점→90% 얻어내기.’ 이런 식이다. 애틀랜틱시티 카지노 개발을 하면서 트럼프의 진짜 목표는 동업이었다.

하지만 단독사업에 뜻이 있는 듯 밀어붙였다(전략). 거액의 취득세를 물고 건물 공사도 추진했다. 다만 천천히(전술). 홀리데이호텔그룹이 몸이 달아올라 달려들었다. 유인작전 성공이었다. 트럼프는 이미 공사가 많이 진척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수많은 건설 중장비들을 가져다 놓고 으름장을 놓았다(작전). 결국 호텔은 트럼프가 이미 지급한 토지구입 대금, 공사 대금을 보전해 줬다. 트럼프는 10% 정도의 수고만 하고 카지노 수익의 절반을 얻었다.

■ 상대 교란·위장의 달인…현명한 대처를

‘앙숙’인 NYT 본사 방문 과정은 트럼프 국정 스타일의 예고편이다. 트럼프는 당일 새벽 트위터에 “방문을 취소한다”고 띄웠다. NYT는 패닉에 빠졌다. 그러더니 돌연 ‘1부 비공개, 2부 공개’를 조건으로 가겠다고 했다. ‘취소’는 본심이 아니었던 게다. 트럼프는 NYT를 한마디로 갖고 놀았다. 그러곤 (트럼프에게 유리한) 특종 몇 개를 선물로 줬다. 상대방을 마음껏 혼란시키다 결국 10%(앙숙 본사 방문)를 희생하고 90%(자신의 이미지 향상)를 얻어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트럼프식 협상’에 대응하는 절도와 기술이다. 트럼프를 연구하지 않고 무지(無知), 무모(無謀), 무책(無策)으로 달려들면 백전백패이다.

호시우보(虎視牛步). 호랑이처럼 날카로운 관찰력, 소처럼 신중한 행보가 필요할 때다. 지금은 먼저 우리의 기본 전략과 전술을 어떻게 할 것인지, 설령 협상하게 된다면 어떤 반대급부를 얻어낼지 궁리할 때이다. 섣불리 달려들면 트럼프의 수에 말려들 뿐이고 국익(國益)과 국격(國格)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요즘 워싱턴과 뉴욕으로 거의 매주 물밀듯 몰려가고 있는 우리 국회의원들, 정부 대표단의 행태는 우려스럽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깜짝 놀라 탐색에 나서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된다. 하지만 트럼프 변방 인사나 친한파 단골 인사를 만나 “우리 방위비 분담금 많이 내고 있거든요” “정말 한·미 FTA 손볼 건가요”라고 하소연한들 달라질 게 없다. 아니 손해일 수 있다. 트럼프와 진짜 트럼프 핵심 측근들은 멀리서 지켜보며 웃고 있을지 모른다. “협상도 하기 전에 몸만 잔뜩 달아올라 약세를 보이며 달려들고 있는 모습이란. 이거 잘하면 90%가 아니라 100%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아.”하면서 말이다.


그동안 정치권에서 위험천만한 인물로 우려했던 트럼프에게 배워야 할 처지에 있다면 제대로 그의 스타일을 읽고 현명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문윤홍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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