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일

I-Ⅱ.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다
이순신이 전사한 날은 1598년 11월19일이다. 당시 마지막 이틀은 기록이 없다. 이는 노량해전에 참전 중 전사했기에 일기를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개인사와 인간적인 모습 그리고 활약을 복원한 기록은 주로 일본과 중국자료를 참고했다. 난중일기에 기록되지 않은 해상 전투나 선조에 의해 서울로 압송될 때의 기록 등은 다른 사료를 통해 상황을 복원했다.


이순신이 태어난 1545년의 국내 상황은 매우 어지러웠다. 피를 부르는 사화가 일어나고 백성들은 계속된 흉년과 굶주림에 지쳐 도처에서 임꺽정 같은 민란(民亂)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아울러 조선최고의 학자인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그리고 조선의 대표적 시인 정철도 같은 시대에 병존 했다. 조선 유학자를 대표하며 성리학의 거두인 이황과 이이는 걸출한 인재였다. 조선 문학사의 한 획을 긋는 정철의 작품은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화법으로 사회를 비판했으며 힘없는 백성을 대변한다고 난(亂)을 일으킨 임꺽정도 시대의 어지러움을 대변했다.

이순신의 조부인 이백록은 신진사대부 조광조가 이끄는 기묘사화에 연루돼 중형을 받았다고 기록된 자료도 있으나 필자가 여러 자료를 종합 분석해본 결과 당시 이백록은 연소한 제자였기에 과거응시가 제한되는 비교적 가벼운 징계를 받았다. 이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지 못해 평시서(平市署,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관청)의 봉사직책에서 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란 서로 다른 목적으로 서로 다른 성격의 인물들이 만나 엉키고 어우러지면서 갈등과 화해를 거듭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간다. 이순신이 살아가던 시기도 다를 바 없었다.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도 관직생활은 하지 못했다. 당시 이순신 집안은 능력 있는 문신 집안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이 기묘사화에 연루돼 부친 이정도 관직에서 하급관리인 평시서 봉사(종8품)에 그치면서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

이정은 부인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4남1녀을 두었다. 그 중 이순신은 4남중 3남이었다. 이순신의 형제들도 인재가 없었다. 큰형 희신은 평범한 사람이었고 작은 형 요신은 소과인 생원에 급제했지만 능력이 변변치 못했다. 동생인 우신도 공부와는 거리가 있어 과거급제를 기대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됐다.

이순신도 문과계통보다는 무과에 관심이 많은 청년이었다. ‘충무공전서 忠武公全書’에 따르면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주가 있어 성공할 만했다. 하지만 매번 붓을 던지고 무관이 되고 싶어했다라는 내용이 기록돼있다. 이 내용을 앞뒤로 잘 분석해보면 문과와 무과에 모두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영웅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표현한듯하다. 당시는 무과보다는 문과가 중시되던 시절로 원래 이순신의 선대에는 이름난 문반(文班,국정을 주도한 양반계층의 하나)의 집안으로 문반집안에서 무반을 지원한다는 것은 드문 일로서 아마도 문과에 재주가 없어 무과에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이 태어난 곳은 한성의 건천동 (지금의 서울시 중구 인현동 남산 북쪽)이었다. 건천동은 도성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 동네에서 자란 유성룡과 친분을 쌓았으며 이는 이순신이 관직에 있을 때나 어려움에 처할 때 영향력 있는 인맥으로 작용한다. (계속)


<유인일 행정학박사·제천시통일안보전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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