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일 제천시통일안보전문관·행정학박사

Ⅰ­Ⅲ 강직한 성격과 공직생활

이순신은 용모는 단정했지만 과묵하고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겉모습은 전형적인 선비와 같았지만 담력과 용기가 뛰어났다. 형제들 간의 우애도 있었고 먼저 죽은 형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들보다 더 끔찍이 보살폈다. 조카들을 모두 혼인시키고 난 다음에야 자신의 자식들을 혼인시켰다.

이순신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대기 만성형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했다. 무과에 합격했을 당시 합격자 29명의 평균연령은 34세였으니 32세의 이순신은 평균연령보다 낮은 셈이다. 이순신은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해 28세 되던 해 훈련원에서 주관하는 별과(무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달리는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인데 이순신의 일화 중 낙마해 다리를 다치자 버드나무 껍질로 동여매고 시험을 치렀다는 이야기가 이 시험에서 비롯됐다. 이 후 이순신은 4년 뒤 식년무과(式年武科)에 합격했다.

최초에 보직을 받은 곳은 동부비보(지금의 평안북도 삼수군의 압록강 상류지역)였다. 당시로는 최전방으로 여진족과의 접경 지역이었다. 최초 근무지인 함경도 동구비보의 보(堡)는 작은 성이라는 뜻으로 최전방에 설치한 작은 군사기지였다. 이순신의 최초 근무지인 동구비보는 당시에는 여진족의 출몰이 잦아 인명피해가 많았던 곳으로 동구비보를 시작으로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와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했고 전라도 정읍의 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이순신은 나이 마흔두 살 때 함경도 조산보로 발령을 받는다. 품계는 올라서 종4품이었다.

최전방에 근무할 당시 일화를 한 가지 소개하면 1587년 9월경 녹둔도의 둔전에 여진족이 침입해 군사 10여명을 살해하고 주민160여명을 사로잡아 갔다. 이에 이순신이 경원부사 이경록과 함께 추격해 3명을 사살하고 50여명을 귀환시켰다. 적절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의 침입을 퇴치하지 못한 죄로 삭탈관직 당하고 백의종군을 하게 됐다. 이것이 첫 번째 백의종군이다. 유성룡은 여러 번 이순신을 천거(薦擧)하고 여기에 따른 글도 올렸으나 그 누구도 이순신을 추천하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지 10여년 만에 겨우 현감에 올랐을 뿐이었다.

그러나 남이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묵묵히 공인(公人)으로서 맡은바 소임을 다하던 이순신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당시 왜적의 노략질과 횡포로 민심이 흉흉해지고 피폐해지자 선조는 비변사에 명령을 내려 능력있고 뛰어난 장수를 천거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유성룡은 이순신을 천거해 수사(水使)의 자리에 오르게 한다.

1591년 2월 13일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기 약 1년 전의 일이다. 전라좌수사는 전라도 지역을 총괄하는 자리로 독립작전이 가능한 해상 사령관이었다.

부임 후 이순신은 타고난 정직성과 강직한 업무자세로 공직자의 본분을 철저히 지킨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당파싸움이 심했다.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도 서로 달랐다. 후에 김성일은 유성룡에게 민심을 불안하지 않게 하기 위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는 변명을 했다. 하지만 당파에 의해 동인인 황윤길에 서인이었던 김성일은 반대 입장에 설 수 밖에 없었으리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이순신은 조정의 이러한 상황들과는 별개로 차분하게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군선(軍船)을 새로 만들고 수군진영과 해자(垓子)를 보수하며 성(城)을 구축하는 등 군인으로서, 지휘관으로서 수행해야할 기본적인 일들을 차근차근히 수행했다.

이순신이 부임할 때 전라좌수영에는 주력선인 판옥선이 30척, 사후선이 30척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이 점검한 결과 제대로 전투력 발휘가 가능한 군선이 드물었고 보수가 필요한 군선이 대부분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군선을 새로 만들거나 보수하고 거북선을 나대용으로 하여금 만들도록 했다. 이 결과 이듬해 임진왜란이 시작됐을 때는 전라좌수영의 규모가 상당히 방대해진 상태였다.

I-Ⅳ. 이순신의 집안사람들

이순신의 부친 이정(李楨)은 조부인 이백록이 기묘사화(己卯士禍, 조선 중종 14년에 일어난 사화)에 관련되어 관직에 오르기가 어려웠다. 어떤 사료에 보면 종5품의 창신교위라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하지가 않으며 71세에 사망했는데 아들인 이순신의 공로로 덕원 부원군에 봉해졌다. 모친 초계 변씨는 현감을 지낸 변수림의 1남 1녀 중 장녀였다. 시어머니인 이순신의 할머니도 초계 변씨로 2대가 혼인관계를 맺게 된 것은 아마도 선대의 인간관계에서 맺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 변씨는 유독 셋째 아들인 이순신에게 정성을 다했음을 여러 가지 역사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순신도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효심을 나타낸 기록이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1595년 5월4일. 어머님의 생신인데 몸소 나아가 잔을 드리지 못하고. 홀로 바다에 앉아 있으니 회포를 어찌 다 말하랴.
1596년5월4일. 어머니 생신일인데 헌수의 술잔을 올리지 못하여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1597년5월4일. 어머니 생신일이라 슬프고 애통함을 참을 수 없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일부 내용으로 이순신의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애타는 마음을 알 수 있는 문구이다. 더욱이 심문을 받고 옥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하던 중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접한 후 단 5일간의 어머니 상만 간소하게 치룬 것 에 대한 죄스럽고 애달픈 마음을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라고 표현했다. 당시에는 상을 당하면 시묘(侍墓 부모의 거상 중에 3년간 그 무덤 옆에서 움막을 짓고 사는 것)를 하는 것이 보편적인 풍습이었다. 역시 이순신도 백전백승의 영웅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다.  <유인일 행정학박사·제천시통일안보전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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