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빠름을 일컫는 말이 적지 않다. ‘흐르는 물’, ‘달리는 말을 문틈으로 보는 격’ 같은 표현을 꼽을 수 있다. 새해 인사를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1월 말, 설이 코앞이다. 가는 세월은 아쉬움을 남기기 마련이다. 고려 말 문신 우탁의 시 ‘백발가’는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청나라 때 문인 관료 이방응(李方膺)은 유수 같은 세월의 허전함을 시 ‘소나무 그림에 부쳐(題墨松圖)’에서 “그동안 살아온 수많은 세월/ 뿌리 뻗고 가지 무성 찬 기운이 서렸네/ 이를 남긴 하늘의 뜻 알 수 없거니와/ 범 발톱, 용 비늘 늙어갈수록 더욱 단단하구나(一年一年復一年 金盤節錯鎖寒煙 不知天意留何用 虎爪龍鱗老更堅)”라고 수심 가득하게 노래했다.

설날은 절기상 새해가 시작되는 정월 초하루다. 마음을 새롭게 하면서 한 해의 안녕을 빌곤 한다. 정갈한 한 해를 소망한다는 뜻에서 흰 떡국을 끓이고, 복을 부르며 서로 화합하라는 의미의 만두도 빚는다. 만두 속처럼 각각의 맛이 조화를 이뤄 맛깔스런 맛을 내듯, 흩어져 살던 가족이 모여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됐음을 확인한다.

자연스럽게 이에 따른 세시풍속도 매우 다양하다. 설날을 전후해 한 해의 복을 빌어주거나 액을 몰아내는 풍습이 바로 그것이다. 섣달 그믐날 자정부터 정월 초하룻날 아침 사이에 조리장수는 복 많이 받으라고 소리치며 집 마당에 복조리를 던져놓는다. 새해를 맞아 먼저 모든 사람의 복부터 빌어주는 아름다운 풍속이다. 지금은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그 추억의 원형질을 찾는 이들이 설 명절에 민족의 대이동을 한다. 이날만큼은 조용했던 고향이 전국 각지에서 흩어져 살던 가족, 친지로 하여금 떠들썩해진다.

부모를 그리는 마음은 여성에게서 더욱 섬세함을 느끼게 한다.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시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봄(踰大關嶺望親庭)’은 어버이를 그리는 애틋함이 진하게 배어 있다. “자상하신 내 어머니, 백발로 강릉에 계시는데(慈親鶴髮在臨瀛)/ 이 몸은 서울 향해 혼자 떠나네(身向長安獨去情)/ 고개 돌려 북쪽 마을을 때때로 보니(回首北村時一望)/ 흰 구름 흘러가는 저 아래 저무는 산은 푸름을 간직하고 있구나(白雲飛下暮山靑)”

이처럼 부모형제와의 관계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덕목인 인의예지를 배우게 한다. 인의예지를 통해 가족의 소중한 가치에 눈 뜨게 된다. 가족 중에서도 부모는 뿌리이고 생명의 원천이기에 존경과 모심에 소홀함이 있어선 안 된다.

그런데 가슴 아픈 사람들이 이 땅에는 적잖다. 그 가운데서도 이산의 슬픔을 뉘에게 비하랴. 여느 사람들은 추석·설날이면 귀성길에 오르고, 고향이 안겨준 정을 듬뿍 안고 돌아오곤 한다. 하지만 북녘에 고향을 둔 1000만 실향민들은 명절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눈물의 망향가만 부를 뿐이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 <유나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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