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독감

"이상하네, 온 몸에 힘이 없이 나른하고 관절도 좀 아픈 것 같네”

며칠 전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상을 물리면서 아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은근히 걱정이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부터 지독한 감기 몸살에 걸려 끙끙 앓기 시작했다. 꽤 독한 놈이 스며 들었는지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약 먹는 것까지 힘들어 할 정도였다.

그날 이후, 밖에서 지내야 하는 낮에는 어쩔 수 없지만 저녁에는 일찍 들어가서 집안일을 챙기는게 중요한 일과가 됐다. 귀가 후에 가장 먼저 하는 '가내 업무'는 찌개나 국 데우고 동그랑땡도 부치고 해서 그럴듯한 밥상 차리기. “잘 먹고 푹 쉬어야 병이 빨리 낫는다”는 속설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 눈에 차기는 어려운 수준이지만 성의껏 차리기는 한다. 설거지하고 세탁기 빨래 끄집어 내서 정리하고 걸어두면 대충 정리는 끝난다.

설상가상이라더니. 어제부터는 아내의 편도까지 부어 목소리가 갈라져 나올 지경이 됐다. 병원에 다녀온 아내가 “목감기가 유행이랍디다. 꽤 오래 갈 것 같네요ㅠㅠ”라고 카톡을 보냈다. 요즘 독감은 적어도 보름, 길면 한달씩 간다는데 한동안은 시간 나는대로 부지런히 가사노동을 해야 할 모양이다.

간혹 아내가 앓아누우면 그제서야 새삼 다시 깨닫는 점이 있다. ‘각시 노릇하기 힘들었겠다’는 거다. 실제로 집안일은 해도 해도 별다른 표시가 나지 않는다. 열심히 청소를 해도 ‘번쩍번쩍’ 광이 나는 법은 없다. 음식 조리는 잘해야 본전이고 어쩌다 잘못되면 볼멘소리만 듣게 된다. 나름 바쁘게 움직이면서 체력 소모도 많이 하는데 생색은 나지 않는 잔일들이 전부인 셈이다.

예전에는 아내가 아프다고 해도 ‘곧 낫겠지’하며 무심하게 넘기기 일쑤였다. 전형적인 ‘철없는 서방’ 범주를 맴도는 수준이었다. 함께 살아온 세월이 30년을 넘기면서부터 조금씩 변하는 것 같기는 하다. 아내가 조금이라도 골골하면 부쩍 신경이 쓰인다. “가는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뭐라도 해주려고 주위를 뱅뱅 돌며 이것저것 묻기도 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이 늘 호의적이지는 않다.“기운도 없는데, 오히려 신경 쓰이니까 저리 가요”라는 핀잔을 듣는 경우가 더 많다. 서방 하는 꼴이 당최 마뜩지 않을 때 나오는 반응이다. 아픈 사람이 짜증내는 건 당연하니 그러려니 한다.

세상의 아내들은 참으로 강인하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독감에 걸려 힘겨울텐데도 자녀들 식사를 꼬박꼬박 챙기려하는 걸 보면 존경스럽다. 하지만 자식들은 그런 엄마 마음을 모르고 오히려 통박을 놓기도 한다.‘막내가 집에 먹을게 하나도 없다고 투덜대다 나갔다’는 아내의 문자를 받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옛 말씀 그대로다. 집에 가는 길에 동네 마트에 들러 금값이 된 30개 들이 달걀 한판을 샀다. 계란 ‘후라이’ 좋아하는 막내가 반찬 삼아 많이 먹으라고...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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