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일 행정학박사·제천시통일안보전문관

Ⅱ.­III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 대륙에서 많은 침략이 있었지만 섬나라인 일본에서 쳐들어온 예는 보기 힘들었다. 일부 전라도 지역에서 왜구들의 노략질 전례가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일본군의 기습적인 침략은 조선 천지를 놀라게 했다. 일본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겪는 고통의 신음소리가 온 나라에 메아리 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1년 전에 부임한 전라좌수영 수사인 이순신도 역사적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7년의 전쟁 속에서 이순신 개인의 운명은 어떻게 전개 되었을까?

이순이 전쟁이 일어나고 가장 힘들어 했던 부분이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이었다. 특히 경상도 쪽을 담당하고 있었던 경상우수사 원균과의 갈등이 심했다. 원균과의 관계는 ‘난중일기’에 보면 많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투성과에 대한 논공행상과 인간적 질시와 모함 등에 대한 원망하는 내용을 종종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임금 선조는 시종일관 원균에 대한 옹호를 주장했으며 어디서 기인하는 지는 잘 모르지만 이순신에 대한 불신과 원균에 대한 칭송이 선조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흐름이었다.

해전에서 승리란 조선수군이 공적을 보고하기 위해 일본군의 목을 베러 다니는 원균과 전투을 지휘해 승리로 이끈 이순신에 대해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궁금하지만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역사사료가 부족하다. 인간사회에서의 갈등은 늘 분열과 오해를 부른다. 결국 이 문제는 조정에서까지 논의 되기에 이른다.

1594년 11월 12일의 기록에 의하면 우의정이었던 김응남이 “이순신의 공이 크지 않은데도 원균보다 윗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원균이 불만을 품었다” 판돈령 부사 정곤수는 “이순신이 원균의 휘하장수들에게 불공정한 상을 내린 것에 불만”이라고 이야기 했다. 원균과 이순신의 최초의 불화는 통합함대를 구성할 때부터였다.

서로 간에 불신의 골이 깊어지면서 한산도 해전 시에는 작전에 대한 방법론까지 놓고 갈등이 심화된다. 이순신은 일본군을 유인해서 격멸하자는 유인책을 주장하지만 원균은 직접 공격하는 쪽으로 주장한다. 통합함대라고는 하지만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함대가 대부분이었고 부산 진영에서 일본군에 패해 합류한 원균의 함대와 군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원균의 입장에서 보면 이순신이 나이도 어리고 직급이 아래였던 사람인데 전공을 더 높이 받고 상급자로서 지휘하는 것에 대한 불만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당시에는 이순신은 직접 함대를 지휘해서 전쟁을 하는 입장이었고 원균은 전쟁 후에 정리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원균을 매우 가상히 여길 만하다 하였고 주위의 대신들도 긍정적인 발언이나 보고를 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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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일 행정학박사·제천시통일안보전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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