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의 모함까지 보태며 5개월20일간 '옥살이'…난중일기중 이때 기록은 없어

Ⅱ-Ⅳ. 일본의 반간계와 백의종군

선조는 이순신과의 간극이 더욱 벌어지게 된다. 거기에다 선조가 신임하고 있는 원균의 모함까지 보태져 한성으로 압송되기 이른다. 압송된 이순신은 모진 고문과 죽을 고비를 넘기고 주위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백의종군하기에 이른다.

필자가 연구해 본 결과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여기서부터 긴 기간 동안 기록이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운 결과가 죄인으로 낙인찍힌 울분 때문에 일기를 쓰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죄인 신분에서 일기를 쓸 상황과 여건이 안됐으리라 추정된다.

1596년 10월 10일부터 1597년 4월 1일의 난중일기 기록은 없다. 무려 5개월 20일간으로 중요한 국사와 감옥에서의 과정을 잘 알 수 있는 기간이라 아쉬운 점이 많다. 풀려난 날의 일기는 아주 단순하게 기록돼 있으며 냉정함을 찾으려는 이순신의 마음이 잘 담겨있다.

주위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해 감옥을 나오면서 이순신은 착잡한 마음이지만 담담하게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날의 난중일기는 “1597년 4월1일 , 옥문을 나왔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가 와서 보았다, 슬픔을 이길 길이 없다. 지사 윤자신이 돌아갔다가 저녁 식사 후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도 왔다. 술잔을 권하며 진심으로 위로해 사양할 수가 없어서 억지로 술을 마시고 취했다. 영의정 유성룡,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원 등이 사람을 보내 문안 인사를 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순신 자신이 술을 마시고 취했다는 표현은 처음이다.

감옥에서 나와 세상을 보니 여러 가지로 착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음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왕에 대한 원망은 산처럼 쌓이고 백성에 대한 책임의식이 강처럼 흐르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일이었고 살아있기에 할 일이 있었다. 이순신은 다시 군인의 길을 걸어야 했다.

조선의 바다를 책임졌던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백의종군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젊은 날의 상황과는 달랐다. 지금은 조선의 운명이 걸린 위급한 상황이었다.

소신껏 수행한 일이 죄가 돼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이순신은 남해 바다가 있는 곳으로 말 잔등에 의지해 터벅터벅 가고 있었다.

슬픔은 겹쳐 온다고 했던가.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기 위해 백의종군하는 도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는다. 죄인이 된 몸으로 어머니를 뵙기 송구하던 차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했다.

군인이라는 직업 때문에 생(生)의 대부분을 외지에서 근무하는 관계로 효도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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