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꽤나 오래 미뤄왔던 집들이를 했다. 지난해 이사를 한 후 어지간한 지인들은 다 다녀갔다. 하지만 고령이신 장인 장모님은 그동안 새 집을 구경하지 못하셨다. 이래저래 일정을 맞춘 큰 처남이 점심때에 맞춰 두 분을 승용차로 모셔왔다.

옛분들이라 그런지 이런저런 물품들을 한 짐이나 챙겨오셨다. 큰 처남 차량의 뒷 트렁크가 가득 찼을 정도로 여러 가지 물건들이 가득 차있었다. 두루마리 화장지, 크리넥스 티슈, 양초 등은 물론 20KG들이 쌀 한가마까지 집 안으로 들여 놓았다. 앞으로 살림이 잘 풀리고 잘살라는 덕담도 건네셨다.

두 분은 우리 사는 모습이 꽤나 궁금하셨던지 문을 닫자마자 방마다 돌아보셨다. ‘집이 좁아보인다’ ,‘사는 건 불편하지 않나’.‘집 사는데 돈이 많이 들었나’ 등등 많은 질문을 퍼부어 대셨다. 아내는 장인 장모님이 걱정하지 않을 수준에서 적당히 답변하는 것으로 넘어갔다. 그런 다음에도 장모님은 한참을 더 여기저기 점검을 하고 다니셨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안심이 되셨던지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장모님은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하신 후 불편하신지 의자에 앉기를 즐기신다. 그나마 수술 이후 별다른 통증은 없다시니 다행이다.

아침부터 미리 예약해 둔 식당에 들러 마침 다 끓여낸 갈비탕을 일회용 용기에 담아 집으로 배달한 터였다. “별다른 것 준비하지 않을 것”이라던 아내는 약속을 어기고 집들이하기 하루 전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동파육과 나물 반찬을 하느라 부엌을 떠나지 못했다. 더구나 당일에 큰 처남이 꼬막을 잔뜩 가져오는 바람에 함께 씻고 닦고 끓여 내느라 부산을 떨었다.

두 분은 이가 좋지 않으시다면서도 맛나게 식사를 해 주셨다. 처남도 흐뭇한 표정으로 수저를 놀렸다. 사위와 딸 된 입장에서는 뿌듯할 뿐 이었다. 이럴 때 마다 가족 간의 애증에 대해 한번쯤 더 생각하게 된다. 미운정 고운정 다 들고 지내는 것이 식구라고들 한다. 하지만 ‘피붙이 끼리’라는 구실로 서로 지켜야 할 경계를 넘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가를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살면서 이사를 많이 한 편은 아니다. 어쩌다 집을 옮겨도 사돈들이 살아계셨을 때는 두 분이 거의 우리집에 발걸음을 하지 않으셨다. 1930년대에 출생하신 장인 장모님은 “여인이 시집 가면 그 집 귀신이 되는 것이 법도이다”라는 말을 굳세게 믿는 편이다. 나머지 사안들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어쩌다 정치 경제 얘기라도 하게 되면 꽉 막힌 벽에 부딪힌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기야 우리 자녀들도 “엄마 아빠와는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을 간혹 할 정도니 세대 간의 간극이란 골이 깊고 큰 모양이다.

점심 후 잠시 눈을 붙이신 두 분이 슬그머니 일어나시더니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신다. 놀만큼 놀았으니 가시겠단다. 큰 처남은 두말없이 따라나선다. 차에 시동을 걸고 작별인사를 건넨다. 세상의 모든 만남 뒤에는 늘 헤어짐이 따라 온다. 아내는 한동안 차량 뒤 꽁무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득 궁금해 진다.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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