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Ⅳ. 일본의 반간계와 백의종군

어머니의 장례식을 겨우 치르고 흐르는 눈물을 소매 깃으로 훔치며 이순신은 남해바다로 향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되뇐다. 누구를 위한 충성인가? 누구를 위해 전장에서 목숨을 버려가며 싸우는가? 말 잔등에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숙였던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생각한다. 그 답은‘나라와 백성이다’라고….

백의종군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청렴과 강직함은 그대로다. 따르던 시종이 마을사람들에게 밥을 얻어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종을 매로 다스리고 쌀을 도로 갚게 했다.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은 절대 참지 못하는 그였다. 남해를 향해 가던 중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참패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때가 1597년 7월이다. 그날의 난중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했다. 16일 새벽에 수군이 대패해 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와 여러 장수들이 크게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었다. 원통해서 통곡했다. 얼마 있느니 원수 권율이 왔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을 어쩔 수 없다며 오전 내내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내가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들은 뒤에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질문에 권율은 기뻐하며 승낙했다”

이순신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바다로 다시 나갔다. 휘하에 있던 부하들과 백성들은 이순신을 울며 맞이했다. 이순신은 쉬지 않고 남해바다를 정찰하던 중에 선조의 교서가 도착한다. 이순신은 선전관 양호가 가져온 교서를 받았다. 교서에는 선조의 여러 가지 마음이 같이 들어있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조선의 앞날과 백성이었다. 이순신은 다시 시작했다. 남아있던 군선은 겨우 12척이었다. 거기에 배 한척을 합해 총 13척이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시절의 그 많던 장수와 군사는 칠천량 해전에서 대참패해 사상자가 많이 나고 전함도 많이 소실됐다. 현실은 암담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깊은 고뇌에 빠진다. 위기 속의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를.

Ⅱ-Ⅴ 위기를 극복하다

백의종군 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을 백성들은 반가워하며 맞이한다. 난중일기을 빌어 표현해 보면 “1597년 8월 9일. 일찍 출발해 낙안에 이르니 많은 사람들이 5리 밖까지 나와 맞이했다. 백성들이 도피하고 흩어진 까닭을 물었다. 병마사가 일본군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에 지레 겁을 먹고 창고에 불을 지르고 도피해 백성들도 도피했다고 했다. 고을에 이르니 관청과 창고는 모두 불탔다. 남은 관리와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다가와 인사했다. 오후에 길을 떠나 10리쯤 가니 노인들이 길가에 앉아 앞 다투어 술병을 바쳤다. 받지 않으려고 하니 울면서 받아주기를 간청했다. 저녁에 보성의 조양창(지금의 전남 보성군 조성면 조성리)에 도착했다.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창고에도 곡식이 그대로 있었다. 군관 4명을 시켜 지키게 하고 김안도의 집에서 잤다. 집 주인은 벌써 피난가고 없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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