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일 행정학박사·제천시통일안보전문관

Ⅱ-Ⅴ 위기를 극복하다
당시 이순신을 생각하는 백성들의 마음은 한결 같았다. 믿고 따를 사람이 조선천지에 없었다.
조정대신들과 왕은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하는가 하면 장수라는 사람들도 도망가기에 바빴다.
백성들을 돌봐주고 어루만져줄 사람들이 흔치 않았다. 역사 자료를 보면 임진왜란 당시 장수들이 도망했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곤 한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은‘필사즉생 생즉필사’의 각오로 명량의 기적을 이룬다. 비교할 수 없는 전투장비와 인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세계 해전사에 남을 전승을 거둔다. 전투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우수한 장비도 수적 우위도 아니었다. 오직 그것은 지휘관을 중심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전승의 각오로 똘똘 뭉친 조직이었다. 이순신도 두려움이 앞섰지만 조선의 앞날과 백성의 안위를 생각하며 이를 극복했다.

이순신의 승리는 조선의 승리였고 백성들의 안위를 보장하는 승리였다. 이순신이 일본수군을 이겼다는 소문이 조선 각지에 전해졌다. 이순신이 있는 곳으로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곤 조선 팔도에 하나도 없었다. 피난민에게 둔전관리를 맡겨 농사를 짓게 하고 일부를 군수품으로 조달했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다시 군선(軍船)을 건조하고 무기를 제작했으며 장병들을 모으고 훈련시켰다.

그러나 이순신에게 또 다른 슬픔이 밀려온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심란한 꿈을 꾸었다고 전해지는데 이순신은 또 다시 꿈을 꾸다 잠에서 깬다. 이튿날 편지가 도착한다. 그날의 난중일기는 이렇게 길게 쓰여졌다.

“1597년 10월14일. 새벽 두 시경에 꿈을 꾸었다.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달리다가 말이 발을 헛 디뎌 냇물 속으로 떨어졌는데 넘어지지는 않았다. 막내아들 면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것 같은 꿈을 꾸다가 잠을 깼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에 모르는 사람이 천안으로부터 왔다. 집안의 편지를 전하는 것인데 편지를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떨리고 정신이 아찔했다. 겨우 겉봉을 뜯었다. 차남 예의 편지였다. 겉에 통곡(痛哭)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있었다. 막내아들 면이 전사한 것을 알았다. 너무 놀라 넋을 잃고 통곡 또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한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마땅한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단 말인가? 천지가 깜깜하고 햇빛이 보이지 않는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날 버리고 어딜 가느냐? 남달리 영특해 하늘이 시기하는 것인가. 내 지은 죄가 네게 미쳤는가. 이제 세상에 살아 있으나 누구에게 의지할까?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다.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아직은 의지할 곳이 없어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어가야 한다. 마음은 죽고 몸뚱이만 남아 울부짖는다. 통곡! 통곡한다. 하룻밤 지내기가 일 년 같다.”

자식을 부모의 마음이 가슴을 저리게 하는 일기다. 그러나 이순신은 군인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지고 있었다. 진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자식의 죽음 앞에서도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명나라에서 원군이 도착하고 명나라 장수인 진린과도 여러 가지를 협조하고 조율해야 했다. <계속>

유인일 행정학박사·제천시통일안보전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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