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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리의 가족이야기] 딸들아, 설거지는 나중에 해자유기고가
어쩌다 가족 행사라도 하고 나면 설거지 거리가 잔뜩 나온다. 갖가지 종류의 식기와 수저 등이 빼곡하게 개수대에 쌓인다. 큰일을 치르고 나면 늘상 겪게 되는 일이다. 손님들을 배웅한 후 집으로 들어와서 그걸 쳐다보면 은근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그럴 경우 대부분 아내와 함께 세척 작업에 들어간다. 가능하면 그날 모임에서 즐거웠던 상황들에 대해 얘기를 주고받으며 노동의 강도를 낮추고자 애를 쓴다.

딸 둘을 키우는 동안 아내가 ‘거들라’거나 ‘도와 달라’는 얘기를 하는 걸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아주아주 피곤해서 남편인 나까지 애써 모르는 척해도 묵묵히 혼자서 그 많은 설거지를 끝낸다. 힘들고 짜증이 날만도 하건만 희한하게도 얼굴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덤덤하다. ‘내 할 일 내가 하는 것이니 당연하다’는 듯 달관한 모습이어서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내는 딸들이 설거지하는 걸 탐탁치 않게 여긴다. 이유는 간단하고 명백하다. “시집가면 평생 손에 물 마를 날 없는게 우리나라 대부분 여자들의 팔자”라며 “엄마 곁에 있는 동안에는 설거지 하는 꼴 보기 싫다”는 것이다. 결혼과 동시에 밥하고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집안 청소까지 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애기 낳으면 육아까지 포함해 할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게 아내의 지론이다. 그러면서 아픈 부분을 콕 짚는다. 맞벌이 부부 중 힘도 없는 여자가 남자보다 무려 5배나 넘게 가사를 떠 맡는게 말이 되느냐고.

그래서인지 으리으리한 집에서 가사도우미를 두고 살림은 팽개친 채 엉뚱한 짓거리나 하는 배우들이 나오는 TV드라마에 대해서는 ‘극혐 알러지’ 반응을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저렇게 사는 집이 얼마나 되겠어”, “비싼 밥 먹고 참 할 일도 없나 보다”, “에구, 저러니 집안 꼬락서니가 어찌 되겠느냐고?” 화면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또는 한심한 서방 들으라는 듯이 쏟아내는 단골 레퍼토리다. 30년 넘게 같이 살면서 들어온 갖가지 감상평은 이제는 거의 외울 정도다.

지난해 웨딩마치를 울린 큰 딸은 친정에서 자라는 동안 설거지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일 듯 싶다. 그저 제 먹을 것 챙겨 먹고 자리 털고 일어나면 끝이었다. 신부 수업한다며 요리 실습을 한 뒤에 남는 상당량의 그릇과 도구들에 대한 뒤처리는 아내나 내 몫이었다. 제 짝을 만나 신혼가정을 꾸린 지 1년이 넘었다. 하지만 어찌 살아가는지를 묻기는 조심스럽다. 딸 둔 아비 입장에서의 희망사항은 ‘신랑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으면’ 하는 것 뿐이다.

아직 시집가려면 먼 둘째 딸도 설거지와는 담을 쌓고 산다. 요즘 젊은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파스타 같은 음식을 좋아해서 가끔씩 제가 만들어 먹는다. 닦아야 할 크림 스프가 묻어 있는 프라이팬과 조리 기구는 오롯이 싱크대에 쌓여 있다. 아내와 나, 두 사람 가운데 먼저 보는 이가 후딱 치운다. “그래, 나중에는 하기 싫어도 지겨울 정도로 해야 할테니 지금이라도 편히 지내렴.”

집안의 장손인 나는 어릴적부터 “사내가 부엌에 가면 고추 떨어진다”는 얘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자란 구닥다리 세대이다. 하지만 세상은 전혀 달라졌다. 남자 셰프들이 먹방을 쥐락펴락하는 요즈음이다. 부부가 함께 요리하고 뒷마무리까지 하는 가정이 부쩍 늘면 좋겠다. 그러면 이 땅에 사는 딸들의 설거지 부담은 물론 명절 후 이혼 급증 사례 등도 한층 줄어들 듯 싶다.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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