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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TV토론이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시청률이 인기 드라마 수준이다. TV토론 덕택에 유권자들은 굳이 유세장에 가지 않더라도 집이나 사무실에서 편안하게 후보들을 비교 평가할 수 있다. 과거에 유세중심의 선거운동에서는 천문학적인 선거비용이 들었다. 대도시 광장 유세를 준비하는 데 단 1회에 100억원 이상을 썼다는 얘기도 있다. 후보들끼리 군중의 규모를 놓고 경쟁하다 보니 전국의 버스가 동날 정도로 사람을 동원했고 대도시는 교통마비 사태를 빚기도 했다. TV토론은 ‘돈선거’를 바꿔놓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현재 5명의 후보가 혼전을 벌이는 한국식 토론은 미국식과 크게 다르다. 미국은 지난해 트럼프와 힐러리 토론에서 보듯이 1대1 맞장토론이다. 두 사람만 출마했기 때문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대선 때마다 보통 100명 정도가 출마선언을 하고 20명 정도가 후보등록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TV토론에 나오는 후보는 공화-민주 양당 후보다. 미국의 정당체제가 양당체제로 굳어져 있긴 하지만 미국에도 정당은 일일이 셀 수 없이 많다.

■ 美는 유력후보만 가려 1:1토론

도저히 당선가능성이 없는 후보까지 나와서 토론을 하는 것 보다는 유력후보끼리 토론을 하는 것이 유권자에게는 좋다. 누가 더 나은 후보인지 가려내기가 쉽기 때문이다. 지지율이 가장 낮은 후보들이 가장 토론을 잘했다는 반응이 나오게 되면 유권자들로서는 헷갈린다.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은 지지율 최상위권 후보는 공격을 받느라고 정신이 없는 반면에 하위권 후보는 공격만 하지 공격을 받을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 우리는 왜 미국처럼 1대1 맞장토론이 이뤄지지 않는 것일까? 아직 어떤 TV에서도 맞장토론을 추진한다는 보도는 없다. 맞장토론을 제의했다는 보도도 없다. 당연히 5자토론을 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TV방송국이 너무 차기권력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TV방송국으로서는 성사여부를 떠나 당선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들에게 양자토론을 제의라도 해보는 것이 언론으로서 취할 태도다. 중앙선관위가 주관하는 토론은 현행법상 5자토론으로 해야 하지만 그 밖의 경우는 방송국의 자유에 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 ‘맞장 불리’ 1등후보…방송국 눈치만

필자가 1992년 관훈클럽총무를 맡았을 때, 14대 대선이 있었다. 이때 토론과 권력의 관계를 시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야당의 김대중 후보는 TV토론에 적극적이었으나 여당의 김영삼 후보는 아주 소극적이어서 토론을 성사시키는 데 애를 먹었다. 김영삼 후보는 관훈클럽 토론에만은 꼭 나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선거일에 임박해서야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김 후보의 대선토론 출연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도 당시 CBS방송만이 유일하게 중계방송을 했다. 쟁쟁한 TV방송들이 있었지만 중계방송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김영삼은 막강한 집권여당 민자당의 후보였고 지지율도 1위였다. 그러나 TV토론에서는 말솜씨가 뛰어난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더 유리할 것이라는 것이 관측이 많았다. 방송들이 이런 전후 사정들을 감안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1등후보가 맞장토론을 피하려는 것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상대보다 앞서가고 있는데 굳이 토론에 나가서 얻어맞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대선 때마다 공화-민주 후보의 맞장토론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온 미국에서도 이런 전통이 확립된 것은 40년 밖에 안된다. 최초의 TV토론은 1960년 닉슨과 캐네디의 토론인데 전 미국에서 1억명이 넘는 시청자가 몰려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그후에는 한동안 이런 토론이 이뤄지지 못했다. 앞서가는 후보들이 2등과의 토론을 적극 기피했기 때문이다. 특히 현직 대통령이 유리한 위치에서 재선에 나갈 때는 자신보다 열세인 야당후보와 굳이 토론대결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지금처럼 맞장토론이 당연한 관행으로 굳어진 것은 1976년 지미 카터와 제럴드 포드 TV토론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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