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초 정경부 국장대우

열흘 남짓 남은 대선을 앞두고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 종교와 정치는 밀착 할수록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유교의 공자는 원래 동이족의 피가 흐르는 걸출한 사나이라는 일설이 있다. 중국인들의 기준로 중국의 동북부 쪽과 한국 및 일본에 분포한 종족들 중 상당수가 동이족이라 했으니 아주 확률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세계 4대 성인 중 한사람이 대한민국 핏줄일 수도 있다하니 과히 듣기 싫지는 않다. 하긴 일본인들은 칭기즈칸을 가마쿠라 막부시대의 무장, 미나모토 쿠로 요시츠네라고 주장하고 있는 설도 있어 주의를 끈 적이 있기도 하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인(仁)을 근본으로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중시하는 학문에 가까워 절대 종교라고 칭하는 자체가 좀 난해한 면도 있다.

유교의 근간을 주군과 남녀 관계의 종적 절대성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이념이 절실했던 조선 태조 이성계가 유교의 매력에 빠진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유교 창시는 공자가 했지만 그 후배인 맹자와 공자의 손자인 증자에 이르러 정립됐다.

고려 말에 한반도에 들어온 유교는 엄밀히 말해 전통 유교라기보다는 유교의 한 갈래인 송나라 때 주희가 재정립한 주자학이 주류였다. 그런데 주자학은 아이러니하게 약간의 허풍에 위선 적인 면과 에로틱한 면까지 담겨 있다.

■ 정권유지 위해 왜곡된 조선유교

시경 305편 중 풍(風)에 실려 있는 남녀상열지사 등 님을 그리는 노래도 모두 주군(님)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랑이라고 주관대로 해석한 장본인이 주희였다(후일 주희는 자신의 해석이 지나쳤다고 술회했다). 이런 가운데 이성계는 자아 성불을 외치는 불교로는 강력한 통치가 어렵다고 판단해 정도전으로 하여금 유교를 ‘각색’, 제도화시키기 시작했다.

머리와 배짱이 좋은 이방원이 이를 잘 활용해 ‘변질의 시초’를 제공했다. 애초 주자학은 중국 본토에서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이후 유교의 주류는 주자학에서 곧 양명학, 그리고 훈고학으로 바뀌게 됐다.

훈고학은 주자학의 ‘확대해석’을 바로잡고 말 그대로 훈고, 즉 옛 문헌 그대로 이해하되 왜곡하지 말자는, 반성을 내포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초창기 유교는 종적 질서가 크게 부각되진 않았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유교는 지금의 유교와는 많이 달랐다. 서자 차별도 없고 남아선호사상도 그리 심하진 않았다.
제사를 자식 간 남녀구분 없이 지냈고, 유산 상속에 있어서도 남녀 간, 적자·서자 간, 배 다른 자손까지 따로 차별을 두지 않았다.

서자 차별은 정권을 장악한 태종이 유교도입 일등공신이자 자신의 가장 큰 정적이었던 서자출신 정도전을 미워해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이후 양반의 양적팽창을 제어하는 목적으로 활용됐다.

■ ‘종교의 권력도구화’ 전철 안밟게

조선 초기 유교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왜곡되기 시작한 것은 성종 때 사림파가 득세하면서부터다. 사림파는 기존 훈고파를 억누르기 위해 정치적 근간이 필요했다. 이 때 유교의 엄격한 잣대를 강제적으로 들이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조세확보를 위해 돈 많은 평민에게 양반신분을 팔기 시작했다. 갑자기 양반으로 승급된 평민들 사이에선 허식이 팽배해졌고 형식위주의 양반문화로 급격하게 재편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정치권과 재벌들의 행태를 보면 과거의 ‘유교 왜곡기’를 떠올리게 된다. 역사에서 종교가 정권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는 모습은 우리에게 주는 어떤 ‘경고’를 던지는지 되새겨야 할 것이다. ‘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을 희롱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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