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경제학) 교수
"근본 경제개혁은 외면, 이벤트성 정책 치중해"
"비정규직 전환문제 일괄적 지시보다 장기적 제도화 필요"

▲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경제학)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정책과 4차 산업혁명 정책이 과거 박정희식 경제개발 패러다임을 답습하고 있다며 새 정부는 약자의 재산권이 보호되도록 법 제도를 정비하고 불공정 거래행위를 엄히 심판하는 기능에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지난달 31일 서울대 금융경제연구원과 자본시장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구조조정-당면한 과제와 해법 마련' 정책 세미나에서 박상인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서울대 금융경제연구원.
[일간투데이 이욱신 기자] 조기 대선으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어언 한 달. 문 대통령은 업무지시 1호로 일자리위원회 설치를 명하고 인천공항공사를 방문해 비정규직 직원의 정규직 전환을 이끌어 내는 등 국가 전반에 변화의 새 바람을 일으키면서 숨 가쁘게 달려왔다. 일자리 창출, 비정규직 전환, 중소벤처기업 육성, 재벌개혁 정책 등 새 정부의 지난 한 달 경제정책 전반에 대한 평가를 대표적인 진보와 보수 경제학자로부터 들어봤다.<편집자주>

'래디컬(radical)'. 급진파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라틴어 'rad(뿌리)'에서 온 말이다. 문제의 뿌리까지 철저하게 파고들어서 근본적인 변화와 해결을 추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경제학) 교수는 래디컬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강력한 재벌개혁을 주장하기 때문에 맞는 말이고 자신이 배운 경제학의 근본을 파고들어서 나온 주장이기에 맞는 말이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주류 경제학자들처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본산인 미국 유학을 다녀왔지만 박 교수는 재벌개혁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시장중심주의 경향이 강한 이들과 거리감이 생겼다. 주류 경제학계에서는 박 교수가 급진적이다고 평가하지만 박 교수는 주류 경제학 원리를 근본적으로 연구하고 성찰하면 자신의 주장이 더 주류 경제학 원리에 부합한다고 반박한다. 자신의 주장이 급진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주류 경제학계가 경제학 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되받아친다.

그렇다고 해서 재벌 개혁을 강조하는 소위 '진보·개혁파' 진영과도 한 묶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 진보·개혁 진영 경제학자들(정파)이 경제현상의 근본 작동원리는 모른 채 현실을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이념적 지향(당위)에 맞춰서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일침을 가한다.

지난 2일 서울대 행정대학원 연구실에서 만난 박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의욕만 앞서서 근본적인 개혁은 하지 않은 채 여전히 과거 박정희식 정부 주도 경제개발 관성에 젖어 이벤트성 행사만 과장되게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촛불민심으로 개혁의 큰 모멘텀(계기)이 왔는데 이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면 좌·우파 정권 교체속에 주기적 경제위기와 양극화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남미형 경제로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일자리위원회 설치를 업무지시 1호로 내리고 첫 민생행보로 인천국제공항공사를 방문해 비정규직 직원의 정규직 전환을 이끌어냈다.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전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 비정규직 전환 문제는 일괄적인 정규직 전환 지시보다는 업무 특성을 고려해 장기적이고 제도화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인천공항공사는 비교적 재정여건도 좋아서 정규직화 하는데 부담을 덜 느끼는 곳이다. 그런 곳을 선택해서 간 것이 이벤트성이 강하다. 근본적인 문제를 고치지 않은 채 이벤트성 행사에 치우치면 그 효과가 오래 가지 못한다.

▲ 새 정부는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중소기업청을 중소벤처기업부로 승격시켜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함으로써 일자리창출을 모색하고 있다.

- 문 대통령이 슬로건으로는 '적폐청산'을 주장하지만 행동으로는 박정희 시대 정부주도 개발 패러다임을 못 버리고 있다. 문 대통령이 일자리상황판을 설치하고 일자리위원회를 만들어서 일자리창출을 독려하는 것과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현황판을 만들고 수출진흥회의 연 것과 얼마나 다른가. 혁신과 일자리는 정부가 나서서 독려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정부는 손 떼야 한다.

▲ 정부주도 경제개발 패러다임에 익숙해서 그런지 정부 역할을 마냥 방기하는 것에 대해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 정부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제도설계자, 둘째는 심판자, 셋째는 행위자. 그동안 우리 정부는 행위자 역할에 치중했다. 경제개발 초기에는 시장이 없어서 정부가 직접 행위자가 돼 해외로부터 외자를 차입해 국내 기업에게 배분했다. 하지만 이제는 시장이 충분히 성숙해서 더 이상 정부가 시장에서 뛸 필요가 없다. 정부는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불공정 거래행위를 엄히 심판하면 된다.

▲ 단순히 제도설계와 심판 기능만으로 정보기술혁신시대 일자리 창출이 가능한가.

미래 정보화시대는 예측불가능성이 특징이다. 어느 산업, 어느 제품이 빅 히트를 할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특정 산업을 겨냥해서 저가의 노동력과 정부-대기업의 대규모 자본 투입으로 따라잡은 '추격형(Catch-Up)경제'의 관행에 너무 젖어 있다. 정부는 스티브 잡스를 찾아서 키울 생각을 하지 말고 누군가가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 주면 된다.

▲ 새 정부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재벌개혁도 정부가 손을 놓아야 하는가. 새 정부에서는 재벌개혁론자로 알려진 김상조 한성대 교수를 공정거래위원장에 지명하고 장하성 고려대 교수를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임명하는 등 재벌개혁·공정거래에 대한 의지가 강한 것 같은데.

- 재벌개혁은 어느 하나만의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처방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수준에서 전방위적으로 해야 된다. 그런데 4대 그룹에 집중해서 실효성 있는 재벌개혁을 추진한다더니 어느 순간 골목상권-유통업 상생으로 축소된 것 같다.

밀턴 프리드먼이 "규제기관이 있는 곳에 규제가 있다"고 했다. 규제를 담당하는 관료들에 의지하고 포획되면 진정한 재벌개혁은 힘들다. 관료들이 퇴임 후 자신들의 재취직을 걱정하기 때문에 재벌문제의 근본적인 개혁에 손대기를 꺼린다.

▲ 어떤 방법으로 추진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방법을 말한다면

- 우선 너무나 취약해 아프리카나 중남미 개도국 수준인 (약자의) 재산권을 확립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탈취를 근절해야 한다. 중소기업은 기술혁신을 했더라도 대기업이 뺏어 가면 꼼짝할 수가 없다. 소송해도 보상금은 적고 소송비용도 부담이다. 일단 소송을 제기하면 거래가 단절돼 회사 문 닫을 각오를 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약자의 재산권이 실질적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가해자의 경제적 능력(매출액)에 비례한 배상을 통해 손해배상 책임을 강화한 징벌적 배상(Punitive Damage), 현재 원고가 부담하고 있는 입증책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원고의 법률대리인(변호사)이 입증에 필요한 심문이나 자료 등의 증거물을 요구하고 법원의 허락 하에 압수·수색도 할 수 있는 디스커버리(Discovery)제도, 집단소송 등의 법 제도화가 필요하다.

▲ 중소기업에 대한 우월적인 지위행사가 되지 않으면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이 저하되는데 대기업이 용인하겠는가.

- 중소기업의 몰락은 재벌 대기업에도 좋지 않다. 중간재·부품 소재를 주로 생산하는 중소기업이 위축되면 대기업이 최종 완성품을 좋게 만들 수 없다.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반면교사다. 60년대까지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빅3' 과점체제를 유지하던 미국 자동차 산업은 70년대 들어서 토요타 등 일본차가 새로운 성능과 디자인으로 파상공세를 펼치자 위기를 겪었다. 기존 납품 중소기업이 혁신적인 완성차에 맞는 부품을 공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전은 토요타 등 일본차들이 미국 현지 생산을 늘리면서 현지 중소기업 납품을 받으며 이들이 기존 빅3와의 전속관계가 깨지면서 일어났다. 새로운 거래선을 만난 미국내 중소기업들이 혁신적인 제품들을 만들어냈고 이들은 다시 빅3에게도 납품을 해 빅3도 혁신적인 자동차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기술탈취를 막는 재산권 보호가 단기적으로는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을 떨어뜨리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술력 향상, 산업의 혁신을 불러 와 대기업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기업-중소기업간의 격차가 해소되면서 중소기업 근로자의 임금도 상승해 대기업 정규직과의 임금격차도 완화된다.

▲ 이번에 근본적인 경제 대개혁을 하지 못하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처럼 장기 불황에 빠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는데.

- 우리나라는 일본형 장기불황이 아니라 남미형 경제위기-양극화 함정으로 빠질 것이다. 일본은 공공부채가 많아도 대부분 국내에서 모두 소화하고 우리와 달리 특정산업·기업에 의존하는 구조도 아니다. 내수시장도 튼튼해서 대외변수에 대한 취약성이 우리보다 덜하다.

우리나라는 특정 산업·재벌대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수출 등 대외변수에 영향 받는다는 점에서 남미형으로 빠질 위험이 크다. 남미에서는 좌파가 집권하면 재정으로 빈곤층 소득을 보전하는 포퓰리즘 정책하다가 재정위기가 온다. 우파가 집권하면 민영화·규제완화해서 외국자본이 들어와 경제가 살아나는듯 하다가 외채위기로 무너진다. 경제위기와 양극화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정권은 교체돼도 경제권력이 교체되지 않아 근본적인 경제개혁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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