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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읽는 이순신 傳] Ⅱ- Ⅶ 제2차 사천해전…거북선 등장하다유인일 행정학박사·제천시통일안보전문관
  • 일간투데이
  • 승인 2017.06.19 15:10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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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언덕위로 후퇴했다. 조선수군은 적의 함대에서 이탈해 정박하고 있던 군선 13척을 불 질러 바다에 수장시켰다. 협소한 지역에서 전투가 이뤄졌고 적이 고지대 능선에서 공격했기 때문에 이순신 함대도 피해가 많았다. 이순신의 총상과 더불어 다수의 사수와 격군(노 젓는 군사)들이 부상을 당했다.

이순신은 그날의 상황을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적의 무리는 두려워 물러났다. 화살에 맞은자가 몇 백인지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적의 머리를 벤 것만도 많았다. 군관 나대용이 총탄에 맞았고 나도 총탄에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사부와 격군 중에서도 총탄에 맞은 군사가 많았다.
적선 13척을 불사르고 물러나 주둔했다.

한바탕 해전을 치루고 나니 어둠이 내렸다. 사천 모자랑포에 정박했다. 사천 해안은 경상우도의 서쪽 끝에 있다. 노량해협만 지나면 전라도와 연결되는 곳이다. 일본수군은 조선수군과 접전 없이 경상도 해안을 점령했다. 그러다 이순신 함대가 출동해 조선수군과 처음으로 전투를 하게 된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수군에게 전투 없이 내어준 조선의 바다 ! 경상도 해안의 남해 쪽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수륙양공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육군은 경상도 방향을 향해 공격하고 수군은 남해를 통해 전라도 방향으로 공격하는 작전이었다.

이순신이 지키고 있는 남해바다에서는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순신의 동진(東進)과 일본수군의 서진(西進)은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6월 1일에는 고성의 사량도(蛇梁島)에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날이 밝자 아침에 첩보를 입수했다.

“일본 군선이 당포선장에 정박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곧바로 출전했다. 아침 8시경에 발진한 이순신 함대는 10시경이 돼서 적의 수군을 발견했다. 적은 육지와 바다에 함께 있었다. 육지에는 적군 300여 명이 성 안에서 노략질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반은 지세를 의지해 이순신 함대를 향해 공격했다.

일본 함대는 대선 9척과 중선과 소선이 12척이 있었다. 대선 한척은 층류가 있는 큰 배였고 층루에는 붉은 비단으로 휘장을 둘렀다. 사면에는 ‘황자(黃子)’를 크게 썼다. 일본장수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투입했다. 그동안 열정을 가지고 창안한 거북선이었다. 성능과 위력을 제대로 시험하기에 좋은 기회였다.

거북선을 앞세워 공격해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거북선이 적의 중심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먼저 총통을 발사했다. 사정거리 안에 들어있는 ‘황자’가 붙어있는 큰 배를 향해 발사했다. 대선(大船)에 명중하자 계속 공격해 다시 들어가면서 총통을 발사했다. 총통을 맞은 전선을 향해 다시 들이받았다. 예상 외로 대선은 쉽게 부서졌다. 거북선의 위력은 대단했다.

<계속>

유인일 행정학박사·제천시통일안보전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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