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기간 32년,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나?

[일간투데이 정우교 기자] 세종대왕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훈민정음 창제 이외에도 외교· 국방 분야에서는 김종서 장군의 6진 개척 및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을 실현했고 과학·예술분야에서는 측우기와 자격루 등을 개발했습니다. 그리고 황희, 맹사성 등의 명재상을 등용하기도 했죠.

조선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다스렸던 왕, 본인의 삶도 그러했을까요? 오늘은 세종대왕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겠습니다. [참고 :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 최용범]

■ 쿠테타 주동자의 손자였고, 아들이었고, 아버지였다

할아버지였던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잡고 1392년에는 조선을 건국합니다. ‘역성혁명’이었으며 ‘쿠테타’인 것이지요.

아버지 태종 이방원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서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왕권 강화를 위해 충녕대군의 장인을 포함한 외척을 역모죄로 몰아 모두 죽여 버립니다. 당시 충녕대군의 나이는 10대였습니다.

세종대왕의 아들도 난을 일으켰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태종은 본인이 그러했듯 자식들이 왕위를 놓고 싸우지 않을까 끊임없이 걱정했다고 전해지는데 정작 사고는 손자들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냈던 것이지요.

영화 ‘관상’에서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 관상가 김내경은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의 상을 ‘남의 약점인 목을 잡아 뜯고 절대로 놔 주지 않는 잔인무도한 이리’, ‘진정 역적의 상’이라고 표현하죠.

그리고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된 태종의 어진도 등장하는데 이는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그리고 수양대군 역을 맡은 배우 이정재의 얼굴을 합성한 이미지라고 하는군요. 두 왕의 비슷한 운명을 절묘하게 표현했습니다.

 

■ 아버지·어머니, 그리고 자식들의 죽음

세종대왕은 즉위하자마자 큰아버지 정종과 아버지‧어머니의 국상을 맞게 됩니다. 무려 7년 간이나 상중에 있었죠. 그리고 자식들도 일찍 죽었습니다. 장녀 정소공주, 광평대군, 평원대군이 각각 ‘마마’, ‘창진’, ‘천연두’로 젊은 나이에 요절합니다. 자식 중 3명이나 요절했으니 세종대왕의 슬픔은 굉장히 컸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실제로 평원대군의 죽음은 세종의 병세가 깊어지고 불교를 받아들이는 ‘숭불’의 원인이 됐다고 전해집니다.

 

■ 세자빈이 글쎄…

세종의 며느리들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며느리 휘빈 김씨는 세자(훗날 문종)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압승술이라는 술법을 써서 쫓겨났고 둘째 며느리 순빈 봉씨는 거침없는 성격과 가벼운 행동, 그리고 술을 즐겼다고 합니다.

게다가 소쌍이라는 궁녀와 사랑에 빠져 결국 폐출됩니다. 동성애인것이지요. 세종실록 75권에서는 이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소쌍이 궁궐 안에서 소제를 하고 있는데, 세자가 갑자기 묻기를, ‘네가 정말 빈과 같이 자느냐.’고 하니, 소쌍이 깜짝 놀라서 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 하였다”

그의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고혈압, 백내장 등 많은 지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결국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은퇴해 세자에게 국정을 맡기죠.

 

■ 세종대왕, 그는 그러한 ‘사람’이다

지난 2011년, 배우 한석규가 연기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속 세종대왕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성군’의 이미지와 다르게 그려졌습니다. 울거나 욕을 하는 등 조금은 괴팍한 모습으로 신하들을 대하죠. 그리고 이런 대사도 나옵니다.

“임금이 태평한 태평성대를 보았느냐? 내 마음이 지옥이기에 그나마 세상이 평온한 것이다”

이 말은 물론 ‘허구’입니다. 하지만 실제 기록 속 세종대왕 주위에서 일어난 ‘불행’으로 비추어 봤을 때 일생 동안 ‘이런 마음이었겠구나’라는 공감이 드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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