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한 해방이기에 우리는 혹독한 대가를 역사에 지불해야만 했다. 결코 꽃길이 아닐 줄 알았지만 시련은 대내외적으로 예상보다 훨씬 매서웠다. 해방 후 3년, 미군정기로 불리는 기간은 새로 수립할 국가의 이념과 체제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로, 막중한 역사적 책임을 져야했다. 그러나 미소의 갈등을 넘는 내부의 분열, 특히 좌우익 간의 갈등과 건국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은 끝내 헤어질 정도로 처절했고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조선’을 정리한 국제약속은 1945년 12월 미영소 외무부장관의 모스크바 결정이다. 이 결정은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남조선 미합중국 사령부와 북조선 소련 사령부’의 대표자로 구성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해, 그 협의 하에 미영중소의 4개국 공동으로 5년간 신탁통치를 행한 후 완전한 독립국가로 이행한다는 것이었다. 찬탁과 반탁의 좌우익의 대립과 미소의 갈등으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조선 임시정부의 수립’의 모스크바 결정사항은 실현되지 못했다.
■ 천년의 군주제를 뒤로 민주공화국 선포
셋째, 농지개혁이 문제였다. 해방 당시 소작인은 전체농민의 5분의 4에 육박했고 수확량의 50%를 지주에게 지불했다. 지주와 소작인 간의 이러한 전근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는 국민적 통합도 민주주의도 이룰 수 없다.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전환함에 있어, 좌파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우파는 ‘유상매입 유상분배’를 주장했고, 북한은 좌파방식으로 남한은 우파방식으로 농지소유를 전환했다. 외관상 무상분배가 유상분배보다 우월해 보인다. 그러나 북한은 무상분배 후 국가가 소출의 40%를 세금으로 거두어 갔고, 이후 무상분배된 농지를 모두 집단 농장화 했다. 반면 남한은 소출의 30%를 5년만 내면 자신의 농지가 될 수 있도록 했다. 30% 상환이 부담스러워 분배받은 땅을 포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실질적으로는 유상분배의 승리로 보아야 한다. 1949년의 농지개혁은 소작농을 ‘세습천형’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넷째, 친일부역자 처리문제였다. 역사청산의 ‘화해와 단죄’의 스펙트럼에서 어느 지점이 정의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당시 분위기는 당연 화해보다는 단죄였다. 독립운동가와 좌파는 청산에 적극적이었고 우파와 미군정은 미온적이었으나, 이 문제로 인한 갈등은 제헌작업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건국헌법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했다. 천년 이상 군주제를 유지해 온 나라에서 서구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군주파와 공화파의 대립이 없었던 것은 우리 제헌사의 큰 특징이다. 1948년 6월 28일 헌법안이 국회에 상정돼 7월 12일 통과됐고, 17일 국회의사당에서 국회의장인 이승만이 헌법에 서명 공포했다. 7월 20일 헌법에 따라 대통령과 부통령이 국회에서 선출됐고, 8월 15일 드디어 정부수립식이 거행됐다. 해방의 감격 속에서 당연하리라 믿었던 통일국가 수립에는 실패했지만, 대한민국은 이렇게 출발했다.
일간투데이
dtoday24@d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