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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성 칼럼]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이야기강원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1945년 8월 15일, 중대뉴스의 발표예고에 따라 조선 전체가 숨죽이고 라디오에 둘러앉았다. 떨리는 목소리,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었다. 사무치게 그리던 해방은 그렇게 갑자기 다가왔다. ‘조선’ 국민 모두에게 꿈인가 생시인가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최초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내 나라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과 환희가 나라 전체에 넘쳤다. 그런데 해방소식에 탄식한 유일한 분이 계셨는데,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소원이라는 백범 김구 선생이었다. 참전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한 미 육군과의 합작 계획이 실행직전에 허사가 되고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우리 손으로 해방을 쟁취했다고 말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기에, 미국은 임시정부를 임의단체로 보았고 한국을 대표할 집단을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 해방후 3년 ‘좌우’ 주도권투쟁 치열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한 해방이기에 우리는 혹독한 대가를 역사에 지불해야만 했다. 결코 꽃길이 아닐 줄 알았지만 시련은 대내외적으로 예상보다 훨씬 매서웠다. 해방 후 3년, 미군정기로 불리는 기간은 새로 수립할 국가의 이념과 체제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로, 막중한 역사적 책임을 져야했다. 그러나 미소의 갈등을 넘는 내부의 분열, 특히 좌우익 간의 갈등과 건국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은 끝내 헤어질 정도로 처절했고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조선’을 정리한 국제약속은 1945년 12월 미영소 외무부장관의 모스크바 결정이다. 이 결정은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남조선 미합중국 사령부와 북조선 소련 사령부’의 대표자로 구성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해, 그 협의 하에 미영중소의 4개국 공동으로 5년간 신탁통치를 행한 후 완전한 독립국가로 이행한다는 것이었다. 찬탁과 반탁의 좌우익의 대립과 미소의 갈등으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조선 임시정부의 수립’의 모스크바 결정사항은 실현되지 못했다.

‘좌우익’의 건국 주도권투쟁은 신탁통치, 정치체제, 토지개혁, 친일부역자처리 등에서 치열하게 대립했다. 첫째, 신탁통치를 놓고 좌우의 대립은 극단의 증오로 치달았다. 시위, 폭동, 충돌, 테러는 해방 후 3년의 모습이었다. 당시 우익은 반탁인 반면 좌익은 찬탁이었다. 반탁에게는, 이제 겨우 해방인데 또 다시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아야 한다는 신탁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능욕이자 수모였다. 둘째, 정치체제는 민주주의라야 한다는데 좌우익의 의견이 일치했지만, 민주주의 내용면에서 우파는 자유민주주의를, 좌파는 인민민주주의를 주장했다. 우파의 승리는 자유민주주의의 중요한 정치적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 천년의 군주제를 뒤로 민주공화국 선포

셋째, 농지개혁이 문제였다. 해방 당시 소작인은 전체농민의 5분의 4에 육박했고 수확량의 50%를 지주에게 지불했다. 지주와 소작인 간의 이러한 전근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는 국민적 통합도 민주주의도 이룰 수 없다.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전환함에 있어, 좌파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우파는 ‘유상매입 유상분배’를 주장했고, 북한은 좌파방식으로 남한은 우파방식으로 농지소유를 전환했다. 외관상 무상분배가 유상분배보다 우월해 보인다. 그러나 북한은 무상분배 후 국가가 소출의 40%를 세금으로 거두어 갔고, 이후 무상분배된 농지를 모두 집단 농장화 했다. 반면 남한은 소출의 30%를 5년만 내면 자신의 농지가 될 수 있도록 했다. 30% 상환이 부담스러워 분배받은 땅을 포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실질적으로는 유상분배의 승리로 보아야 한다. 1949년의 농지개혁은 소작농을 ‘세습천형’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넷째, 친일부역자 처리문제였다. 역사청산의 ‘화해와 단죄’의 스펙트럼에서 어느 지점이 정의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당시 분위기는 당연 화해보다는 단죄였다. 독립운동가와 좌파는 청산에 적극적이었고 우파와 미군정은 미온적이었으나, 이 문제로 인한 갈등은 제헌작업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건국헌법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했다. 천년 이상 군주제를 유지해 온 나라에서 서구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군주파와 공화파의 대립이 없었던 것은 우리 제헌사의 큰 특징이다. 1948년 6월 28일 헌법안이 국회에 상정돼 7월 12일 통과됐고, 17일 국회의사당에서 국회의장인 이승만이 헌법에 서명 공포했다. 7월 20일 헌법에 따라 대통령과 부통령이 국회에서 선출됐고, 8월 15일 드디어 정부수립식이 거행됐다. 해방의 감격 속에서 당연하리라 믿었던 통일국가 수립에는 실패했지만, 대한민국은 이렇게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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