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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필수의 물류문명史] 가야, 우리나라 海洋力의 원천(4) 끝. - 해상교통로한국종합물류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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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7.27 15:42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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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국제교역을 발전시킨 우리나라의 주 교통로는 해로였다. 기원전후기에 평양 인근지역에 낙랑과 대방이 자리하고 있었고 호남과 충청 지역에는 마한이, 경상 지역에는 가야가 위치해 있었다. 또한 왜는 중국과 가야, 마한의 선진문명을 활발히 받아들여 문명의 꽃을 피웠던 시대이며 야요이 시대라고 불린다. 이들은 해상교역 루트를 통해 밀접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다툼과 마찰이 없었던 시기에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에 세웠던 낙랑과 대방은 중국의 선진문화를 마한과 가야지역, 왜 등에 전파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철 생산의 중심지였던 가야는 철을 매개로 낙랑과 마한, 왜 등과 활발하게 해상교역을 전개하며 무역 중개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의 해상교역 루트에 해남 백포만을 포함한 고흥, 여수, 거제도, 남해, 사천 등 남해안 포구가 포함돼 있었고 그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에도 이와 관련된 해상 교역로가 기록돼 있다. 삼국지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에서 왜에 이르기 위해 서해안-한국-남해안-구야한국-대마도-왜로 통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한국이란 지명은 충청도 아산만 일대로, 구야한국은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지역으로 보는 데 이견이 없다.

■ 해상교통 인프라 기술 신라에 전수

따라서 낙랑과 대방은 서남해안의 복잡한 해로를 거쳐 가야와 왜로 소통했고 반대로 왜와 가야도 이 경로를 통해 낙랑과 교류했다. 백제와 왜의 교섭은 백제 근초고왕 때 가야 탁순국의 중재를 통해 시작됐다. 이 때 가야가 제공한 왜에 이르는 해상교통 루트로는 낙동강 하구의 김해 지내동이나 부산 다대포에서 대마도를 경유해 하카다 등 규슈 북단으로 향하는 대한해협 종단해로가 이용됐다.

가야가 한반도에서 멸망할 때까지 가야와 일본열도 간의 교섭은 매우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렇게 낙랑 및 왜와의 교류를 통해 축적한 조선술, 항해술은 가야의 신라 복속이후 신라의 대당교역로 확보로 연결되게 된다. 신라는 가락국의 후예인 김유신의 천거로 선박제조와 운항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가야 유민을 대당교역 중심지인 당은포 개발에 투입했고, 이들의 능력으로 확보하게 된 신라의 대 중국 직접교역은 향후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기반이 된다.

■ 삼국통일 기반된 대당교역로 열어

가야는 역사적으로는 들국화처럼 주목을 받지 못한 ‘미완의 국가’이다. 하지만 해양력을 앞세운 동아시아 교역사에서 그들은 그 어떤 국가보다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뛰어난 조선기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가야에서 생산되는 철기를 수출해 부를 축적했으며, 선진 문물을 왜에 전파해 그들의 고대 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가야가 심어 놓은 해양력은 그들의 멸망 후에도 지속적으로 신라, 일본의 국력 확장에 활용돼 마치 들국화처럼 꽃은 비록 일찍 스러졌지만 해양력은 오래도록 활용돼 뿌리 역할을 했다. 가야의 여섯 부족국가가 위치했던 남동지역에 오늘 날도 세계적인 조선소와 항만이 위치해 있고, 해양 관련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바다를 활용하는 해양력은 군사력과 무역교류를 통칭하지만 해상전쟁의 기록이 없는 고대사에서 해상교류를 통한 무역력만이 해양력으로 간주된다. 해상항로, 항만, 조선, 조운기술 등 고대 해양력을 유적과 사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하면 가야는 장보고와 이순신으로 이어지는 강한 우리나라 해양력의 근원이 되고 있다.

정필수 한국종합물류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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