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여론조사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이하, 박정희)은 전직 대통령 중에서 가장 국민에게 칭송받고 있다. 민족을 가난에서 구하고 근대화를 달성하겠다는 열정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웠기 때문이다. 청렴하고 강직했고, 자신의 것을 챙기지 않았다. 새마을 운동, 고속도로, 포항제철, 그린벨트, 산림보호 등 국가의 기본을 튼튼히 했고 경제도약의 기초를 세웠다.

반면 그늘진 부분도 많았다. 유신헌법이후 권력에 취했고, 자기만의 세계 속에서 권력유지에 집착했다. 필자는 일반인보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데 이는 유신시절 대학을 다녔기 때문이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정치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혁명정부는 1962년 12월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는데, 제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고 임기 4년에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도록 했다. 박정희는 윤보선과 대선에서 두 번 경쟁했는데 모두 승리했다.

■ 3선개헌도 모자라 유신헌법까지

당시 헌법은 대통령직을 2회(8년)로 제한하고 있어 더 이상 대통령직을 가질 수 없게 되자 박정희는 3번까지 할 수 있도록 헌법 개정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이른바 1969년의 3선 개헌이다. 당시 많은 반대가 있었기에 국회 제3별관에서 기습적으로 개정안을 통과시켰는데, 헌정사의 옳지 못한 선례를 남겨 줬다.

대통령직을 딱 3번만 하겠다는 약속 역시 예상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박수 받을 때 떠나는 명예로운 은퇴가 어느 분야건 쉽지 않지만 권력의 세계에서는 더 어려운 것 같다. 3선 개헌이 통과되어 박정희는 김대중과 대선 경쟁을 했고, 당시의 제반 상황을 감안할 때 진 것이나 다름없는 100만 표 차로 승리했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악연은 그 때부터 시작됐다.

3선 개헌 후 박정희는 민심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음에도, 독재체제를 강화하면서 3기 이후, 아니 영구집권을 꿈꾸며 철저히 준비했다. 1971년 12월 박정희는 대통령에게 초헌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을 만들었고, 이듬해 7월 4일 남북한이 무력도발을 하지 않고 대화를 통해 자주적 통일을 추구하자는 ‘7·4 공동성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됐다. 모든 국민들은 마치 통일이 목전에 다가와 있기라도 한 듯이 즐거워했다.

그런데 공동성명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 동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돌연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위 특별조치법에 근거해 국회를 해산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을 중단했으며,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을 1개월 내에 국민투표로 확정한다는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이른바 10월 유신이다. ‘7·4 공동성명’은 당시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국가를 위해 목숨 걸고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해 성사시켰다고 하는데, 남북 간 대화를 위해 간 것이 아니라 10월 유신과 유신헌법을 만들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목숨을 건 것으로 보인다.

■ 근대화 업적 독재잔혹성에 빛바래

남북한 모두 헌법개정일자가 12월 27일인 것을 보면, 헌법개정에 대한 합의를 넘어 날짜까지도 약정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결국 4선 연임개헌은 불가능하니, 개헌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북한을 이용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박정희는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는데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학자들이 유신헌법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것은, 유신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극도로 제약하고, 행정, 입법, 사법을 무력화시키며 대통령을 절대군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유신헌법은 영구집권을 위한 문서에 불과했고 과연 헌법으로 부를 수 있을지 의문시되는 헌법 아닌 헌법이었다. 그래서 십자포화의 대상이 됐다. 박정희는 유신헌법 시행 7년, 1979년 10월 26일 자신이 그토록 신뢰한 부하의 총탄에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광화문 광장에 박정희동상을 세우자는 운동에 나서고 있다. 광화문 광장의 박정희동상. 목에 무언가 걸린 느낌이다. 세종대왕이 뒤돌아 앉거나 이순신장군이 칼을 뽑을 것 같다.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