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춘 시인

물 끓는 소리
신동춘




주전자의 물이 끓는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하루의 체온을 데우는 소리
빈 들에서 이삭을 줍다가
미궁(迷宮)에서 너를 찾아 헤매다가
문득 뒤돌아보고 싶어질 때 되살아오는 소리
에밀리 디킨슨의 잠을 깨우는 소리

자정(子正)이 넘은 교수실에서 물을 끓이면
에밀리 디킨슨이 책갈피를 떠나온다.
황제(皇帝)에게도 무릎을 꿇지 말자더니
기둥 뒤에 숨어서 詩만 쓰더니
그녀가 이 밤
활짝 갠 웃음을 웃으며 내게로 온다.

한 모금의 훈기를 위해
단 한 번의 우연을 기다리며 물을 끓일 때
우리는 홀로 있어도 혼자가 아니다.


■출처 : eBook, '신동춘 시 전집', 한국문학도서관(2007)

▲외로움이 깊어가는 계절이다. 날씨가 싸늘해지는 만큼 우리는 무언가를 찾게 되고, 무언가를 찾게 되는 만큼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신동춘 시인은 자신의 수필집 서문에서 “우리 모두가 무언가를 찾는 마음을 갖는 한 고독하며, 고독을 앓고 있는 한 우리의 영혼은 결코 썩지 않는다.”('고독을 꿈꾸는 들꽃을 위하여')라고 씀으로써 우리의 고독한 추구를 위로한 바 있다. 무언가를 찾으며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황혼 무렵 인생의 허허로운 들판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허무감으로 '싸늘히 식어간'다. 시인은 그럴 때 '주전자의 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상상의 연소작용을 한다. 그러자 그 속에서 오래 흠모하였으나 ‘책갈피’에서 잠만 자던 ‘에밀리 디킨슨’이 살아 나오는 게 아닌가. 이른 바 시적 이상(理想)과의 조우이다. 그 '한 모금의 훈기' '단 한 번의 우연'이 있기에 '자정이 넘은 교수실에서' 외로이 밤샘하는 시인의 정신과 영혼은 결코 외롭지 않다. 지금 싸늘한 방안에서 담요를 뒤집어쓴 채 책을 읽고 있는 그대, 혹은 글을 쓰고 있는 그대여, "우리는 홀로 있어도 혼자가 아니다.”

■신동춘(申東春)
▲1931년 평북 신의주 출생. 2014년 永眠.
▲1947년 가족과 함께 월남(越南).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수료, 한양대 대학원 졸업, 동국대 불교대학 선학과 수료.
▲1966년 '현대문학'지에 추천 완료. '여류시(女流詩)' 동인.
▲국제성심학교, 춘천성심여대 출강, 한양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 역임.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교수불자협의회 부회장, 이화여대동창문인회 회장 역임. ▲제6회 시문학상 수상.
▲시집 : '어느날' '집념이후(執念以後)' '距離에서 假設까지' '꽃비 내리는 하늘' '덫에 걸린 사람들' '속벽암록(續碧巖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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