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문 시인

우리 죽어 살아요
떨어지진 말고 죽은 듯이 살아요
꽃샘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는 꽃잎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 떨어지지 말아요.

우리 곱게 곱게 익기로 해요
여름날의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내고
금싸라기 가을볕에 단맛이 스미는
그런 성숙의 연륜대로 익기로 해요.

우리 죽은 듯이 죽어 살아요
메주가 썩어서 장맛이 들고
떫은 감도 서리 맞은 뒤에 맛들듯이
우리 고난받은 뒤에 단맛을 익혀요
정겹고 꽃답게 인생을 익혀요.

목이 시린 하늘 드높이
홍시로 익어 지내다가
새 소식 가지고 오시는 까치에게
쭈구렁 바가지로 쪼아 먹히고
이듬해 새 봄에 속잎이 필 때
흙 속에 묻혔다가 싹이 나는 섭리
그렇게 물 흐르듯 순애殉愛하며 살아요.


■출처 : '황송문 시 전집', 자유문고(2007)


▲올해도 어느새 상강(霜降)이 지나고 입동(立冬)이 다가오면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계절의 변화 속에서 한 해가 흘러가듯 우리네 인생도 고난을 겪으면서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럴 때 떠올려보게 되는 것이 ‘까치밥’이다. 세월의 혹독한 시련을 이겨낸 늙은 감나무의 앙상한 가지 끝에 붉은 홍시 몇 알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매달려 있다. 그것은 봄부터 겨울까지 ‘꽃샘바람’과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금싸라기 가을볕’과 ‘서리’를 맞으며 ‘단맛’을 익혀왔다. 그러고 나서 그는 기꺼이 “새 소식 가지고 오시는 까치에게 / 쭈구렁 바가지로 쪼아 먹”힌다. 그러나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영존하게 되고, 섭리의 역사는 계속된다. 그리하여 이 시의 첫머리에 던져두었던 “죽어 살아요”라는 삶과 죽음의 역설이 성립하게 되었다. 이 시는 향토적인 소재를 가지고 인류 보편적인 주제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난을 통한 인격의 성숙과 순애를 통한 영원에의 합일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을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經)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重)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나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라.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도다”(고후 4:17-18)

■황송문(黃松文)
△1941년 전북 임실 오수 출생
△영생대학 국문과 졸업. 홍익대 국문과 대학원, 전주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1971년 '문학(文學)'지에 '피뢰침(避雷針)'발표로 등단.
△선문대학교 인문대학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제18회 한국현대시인상, 제3회 홍익문학상, 제1회 전주문학상 등 수상.
△현재 계간종합문예지 '문학사계'편집인 겸 주간.
△서울디지털대학교와 용산 아이파크문화센터 출강.

△시집 : '조선소' '목화의 계절' '내 가슴속에는' '메시아의 손' '그리움이 살아서' '노을같이 바람같이' '꽃잎' '달무리 해무리' '능선' '사랑나무 아래서' '씨나락 까먹는 소리' '연변 백양나무' '조선소의 바다' '하지감자 날선 빛깔' '원추리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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