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쿠데타’를 수없이 만들어낸 ‘배신사관’ 끝내야
곧은길 걷겠다는 사람들이 서로 축복해 주는 ‘순리의 역사’로 가자

배신(背信)의 사전적 의미는 ‘믿음과 의리를 저버림’입니다. 배신은 사람살이에서 일어나서도, 해서도 안 될 금기의 행위이지요. 그런데 배신은 상대적 개념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 했던가요? 세상에는 배신당했다는 사람은 많아도 배신했다는 사람은 드뭅니다. 배신은 신의를 전제로 합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면 배신감에 몸을 떱니다. 하지만 애초 신뢰하지 않았다면 배신감 느낄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공동체가 존재하는 한 크게는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 일파로부터 시작하여 작게는 사사로운 생활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배신은 끝없이 있어 왔고, 또 일어날 것입니다. 근래에 정치권에서도 여러 형태로 배신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정치권이야 본래 근성이 자신의 앞길을 위해서라면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집단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배신’이란 사실이 일어나는 원인의 현장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꼭 배신한 사람만 욕할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배신하는 쪽과 배신을 당하는 쪽의 관계를 살펴보면 배신을 당하는 쪽이 갑(甲)의 자리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갑의 자리에 앉아서 을(乙)의 형편이나 처지나 요구 사항들을 무시하고 깔아뭉개다가 끝내는 ‘팽(烹)’ 시켜 버리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어쩌면 배신은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배신의 계절을 몰고 온 책임을 굳이 말하자면 갑의 책임 쪽이 더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차피 인생살이는 한 다리 건너면 남인데 하나의 공동체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도자상이 어떻게 정립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크게는 나라로부터 작게는 사사로운 단체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공동체가 건전하게 살아가느냐, 아니면 병든 단체로 휘청거리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은 번한 일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배신이라는 말이 부쩍 회자(膾炙)되는 일은 무엇일까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독설 가운데 가장 눈에 띠는 것이 아마 ‘배신의 정치’인 것 같습니다. 그 한 가운데 전 새누리당 원내총무였던 유승민 의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엊그제 10월 31일, 박근혜 전 대통령 최측근이었던 안봉근 · 이재만 두 전직 청와대 비서관이 국정원으로부터 수십억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이들이 청와대 근처에서 5만 원 권 현금을 담은 가방을 전달받았다고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문고리 3인방 가운데 그동안 국정농단 수사의 칼날을 피해왔던 두 사람도 결국 법의 심판대에 오르게 된 것이지요.

그들의 배신에 대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변호사였던 채명성님이 말한 것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의 인터뷰기사에서 배신에 관한 대목을 옮겨 봅니다. “박 전 대통령과 가까웠던 사람들이 도움은 좀 주었나요?” “그게 참... 세상인심이라는 게 무섭습니다.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이라고 불린 사람 중 두 사람은 구속은커녕 기소도 안됐습니다. 최근에서야 국정조사 증인 불출석 혐의로 기소됐다고 들었지요. 탄핵 심판 때 변호인들이 그들에게 증언을 좀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정치권도 마찬가지고요.”

어떻습니까? 어찌 그 배신의 역사가 이 몇 가지에 한 하겠습니까? 우리 좀 더 배신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떨까요? 이성계는 고려왕조를 배신함으로써 왕권을 잡았습니다. 수양대군은 나이 어린 조카 단종을 배신했고, 이시애, 이징옥 등 역대의 반란군 대장들도 대부분 부하의 배신으로 실패했습니다.

동학 농민혁명의 영웅 전봉준 역시 마지막엔 배신한 동학교도의 신고로 관군에 붙잡혔습니다. 만주벌판의 항일대장 김좌진은 다른 사람도 아닌 동족에 의해 등 뒤에서 총을 맞았습니다. 8,15후 최대의 반역은 김구 암살이었지요. 일제 침략자들도 감히 건드리지 못한 백범 김구! 그 거목을 그의 동족 ‘안두희와 그 비호세력’이 시해를 했습니다.

4,19후에도 배신의 역사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장면 총리에 대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의 배신부터가 비겁하기 짝이 없었지요. 반란군을 제압하고 응징했어야 할 참모총장이 반란군의 앞잡이가 되었으니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코미디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런 배신자를 박정희는 ‘실컷 이용만 하고서’ 탁 차버렸습니다. 배신자의 배신당함이었습니다.

박정희는 배신과 반란에 의해 정권을 잡았지만 그 역시 배신에 의해 끝장을 만났습니다. 유신정권도 적이 아닌 ‘같은 패거리’에 의해 장송당한 것입니다. 배신의 행렬은 도도히(?) 계속됩니다. 전두환 노태우 등 ‘30단에 모인별들’이 참모총장 정승화한테 총칼을 들이댔습니다. 그러나 노태우는 훗날 ‘그날의 동지’ 전두환을 배신하고 그를 백담사에 보냈습니다. 광주에서 그토록 용감했던 전두환도 배신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네요.

드디어 문민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문민이 반드시 ‘약속의 정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YS는 JP, TJ 등 정권을 잡은 후 모두 토사구팽(兎死狗烹) 시켜버립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정몽주, 사육신처럼 ‘죽기로 작정한 인간’들도 있었지요. ‘30단’의 회유를 끝까지 물리친 장태완이란 장군도 있었듯이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공한 쿠데타’를 수없이 만들어낸 ‘배신사관’을 끝내야 합니다. 오직 곧은길을 걷겠다는 사람들이 서로 축복해 주며 주고받는 ‘순리의 역사’를 만들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려면 ‘정직사관(正直史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정치의 이름으로 배신과 번복을 오히려 ‘위기관리’라면서 정당화하는 정치문화는 철저히 뜯어고쳐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정직과 부정직’ ‘신의와 배신’의 대결로 앞으로의 정치판을 짜나가야만 나라가 바로 설 것 같습니다.

무리로 나를 선전하고, 모략으로 남을 공격하는 사람은 혹 일시적 인심선동은 할 수 있으나 최후의 승리는 얻지 못합니다. 자기 욕망을 위하여 그른 줄을 알면서도 짐짓 배신을 행하는 자는 사실 반역자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혹 처음에는 잘못 생각했으나 그른 줄 알면 바로 고치고 정의의 편에 서는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일 것입니다.

지금 정치권에 한창 배신의 계절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머리가 어지러우면 끝이 따라서 어지럽고, 머리가 바르면 끝이 따라서 바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배신에 대한 일체의 책임이 다 지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요! <김덕권 원불교 전 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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