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조기호

길을 가다가



어제는 봄날 살구꽃처럼 시디시게 웃었다
아지랑이마냥 아른 아른 주책없이 살다가
오늘은 단풍든 노을도 지나 살얼음 되어 떠내려간다

밀화부리 날아가고 채송화는 져버렸다
이런 것들이 영겁으로 가는 밑거름에 가늠되었다면
높은 산 깊은 강 없으매
잘 살았다

당신을 읽어가면서 풀어보면서.


■출처 : '문학사계' 57호, 새미(2016)

▲니체는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삶이 있는 곳에 의지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의지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보다 높게 평가되는 “보다 높은 곳, 보다 먼 곳, 보다 다양한 것에 대한 충동”을 지닌 채 그 주인이 되고자 하는 기쁨에 생을 건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은 그러한 권력을 갖기 위한 욕망을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어서,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강자가 아니라 거기에 복종하는 약자들조차 ‘샛길’을 통해 자신의 권력에의 의지를 관철하고 정신적인 승리를 얻어낸다고 했다. 거기에 비춰본다면 조기호 시인의 시는 약자의 시이며 무능의 지모로써 승리를 얻어내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니체가 존재와 삶을 강자와 약자, 파괴와 극복의 투쟁적 구도로 몰아간 것은 따져봐야 할 문제지만, 이 시에서 ‘살구꽃’이나 ‘아지랑이’ ‘노을’ ‘살얼음’ ‘밀화부리’ ‘채송화’ 등의 상징물들과 ‘웃었다’ ‘살다가’ ‘떠내려간다’ ‘져버렸다’와 같은 시구들이 지니는 유연한 변화의 힘은 가히 “영겁으로 가는 밑거름”이 되고도 남음직할 것 같기 때문이다. 거기엔 서구식 사고의 산물인 “권력에의 의지”가 아니라 동양의 노장사상과 같은 “자연회귀”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겠다. 이 풍진 세상에서 무엇을 더 가지겠다고 욕심 부리고 얼마나 더 머무르겠다고 연연하여 버티겠는가? 영겁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강자도 약자도 없고 “높은 산 깊은 강 없으매” …….

■조기호(趙紀浩)

△1938년 전북 전주 출생
△전북대 국문과 졸업.
△1960년 '시와 소설'지에 '강(江)' 발표로 등단.
△문예가족, 표현, 전주풍물시 동인.
△전북시인협회 고문, 한국문인협회 전북지회 이사, 전주문인협회 회장 역임.
△제7회 한송문학상, 제3회 전주문학상, 제22회 목정문화상, 제3회 시인정신상, 후광문학상, 표현문학상, 전북문학상 등 수상.

△시집 : '저 꽃잎에 부는 바람아' '바람 가슴에 핀 노래' '산에서는 산이 자라나고' '가을 중모리' '새야 새야 개땅새야' '노을꽃보다 더 고운 당신' '별 하나 떨어져 새가 되고' '하현달 지듯 살며시 간 사람' '묵화 치는 새' '겨울 수심가' '백제의 미소' '건지산네 유월'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꿈꾸었네' '아리운 이야기' '신화' '헛소리' '그 긴 여름의 이명과 귀머거리' '민들레 가시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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